엊그제 3 · 1절 90주년이 지났다. 근대화의 기점을 이 만세운동으로 끌어올리기에는 아쉬운 대목이 많다. 물론 '조선은 독립국이며 조선인은 자주민'이라는 선언을 가볍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근대적 토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근대화 운동이라면 차라리 1905년에 결성된 진보회(일명 일진회)로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친일 조직으로 전락하면서 그 정당성을 통째로 상실하고 말았다. 거슬러 가면 동학운동이 민중종교로 내려앉았고 천주학이 무참하게 유린되면서 자생적인 근대화 가능성은 처절하게 차단되었다.

故 김수환 추기경의 조부가 천주교 순교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근대화는 아직은 과거사 아닌 당대사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표다. 새삼 근대화를 논하는 것은 도저히 근대적이라고 볼 수 없는, 아니 근대화에 대한 거부요 그것에 대한 공포라고 볼 수밖에 없는 반이성과 비합리주의와 폭력에 포위된 우리의 현실 때문이다. 미사일 공갈에 중독된 북한만 해도 그렇다. 북한이 주체라는 이름 아래 전근대 왕조국가로 회귀한 것은 식민지 근대화가 얼마나 취약했었는지를 반증하는 데 다름 아니다. 어떻든 해방은 그 반쪽을 임금의 성씨만 김가(家)로 바꾸어 놓고 말았다. 낡고 추한 봉건국가의 재현이다. 한때 근대화에 가장 성공했다고 평가되던 한국도 돌연 내재해 있던 전근대성이 폭발하고 있다. 북한과의 거리가 오십보 백보다.

이성(理性)에 대한 신뢰,민주적 질서,개인의 가치,재산권의 보장,법치주의,시장경제,개방성이 바로 근대화를 떠받치는 가치 기둥들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사회에서 제기되는 문제군(群)의 상당수는 이들 근대적 가치를 추구한다기보다는 불행히도 그것을 거부하는 데서 발생하는 보수회귀적 투쟁구호다. 물론 선진국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근대화 과정을 밟아 나갔던 것은 아니다. 나치즘과 스탈리니즘이 근대화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낸 기형적 체제였다는 분석에 동의한다면 그것이 험난한 여정이며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반계몽이라는 개념으로 근대성에 대한 거부 체제로서의 나치즘을 분석해냈지만 한국 역시 근대화의 문턱에서 망설이고 주저하며 갈등하기는 마찬가지다. 차라리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혼란기를 비정하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갈등하는 대부분 주제들이 그런 범주다. 지난해 정국을 흔들었던 촛불시위는 개방과 과학에 대한 두려움이요,용산사건은 사유재산권에 대한 거부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민주당이 해머를 들고 국회에 나타난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며, 지난 주말의 연이은 국회 테러사건은 법치에 대한 공포감이 응집되어 표현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좌파적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은 실은 좌파라기보다는 근대화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일 가능성이 크다. 바로 그 때문에 한국 내 좌파는 놀랍게도 시대착오적 봉건국가인 북한에 심정적 친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비관적인 견해라면 박정희 시대에 억눌려 있던 반근대화 본능이 민주화라는 외피를 싸고 본격적으로 표출되는 것으로 지금의 상황을 진단하는 것이다. 부정할 수만은 없다는 데서 절망감을 갖게 된다. 거슬러 올라가 3 · 1운동을 근대화의 첫 단추였다고 보더라도 시간표는 아직 100년조차 채우지 못하고 있다.

산업의 근대화는 어떻게든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정신의 근대화는 쉽게 구축되지 않는 모양이다. 올해는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을 쓴 지 150주년이다. 이 아침,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온전히 세웠던 자유론을 다시 읽게 된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경제 아닌 정치분야에서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