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이 피었을 터이다

그 붉음이 한 칸 방이 되어

나를 불러들이고 있다

나이에 맞지 않아 이제 그만 놓아버린

몇 낱 꿈은 물고기처럼 총명히 달아 났다

발 시려운 석양이다

이제 나는 온화한 경치처럼

나지막이 기대어 섰다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 벽을 두른다

동백이 질 때 꽃자리엔 어떤 무늬가

남는지 들여다보는,큰 저녁이다

문 없어도 시끄러움 하나 없이 들끓는 방이다



-장석남 '방'전문

세월이 흐른다는 것,흐르면서 모두가 변한다는 것,속절없이 늙어간다는 것.받아들이기는 싫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자꾸 늘어난다.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다. 악착같이 붙들고 있던 꿈들을 많이 놓아버렸다.

이제 꿈보다는 추억에 기대어 살아야 하리라.다시 동백꽃 피는 계절.머지않아 핏빛 꽃송이가 시들지도 않고 툭툭 떨어질 것이다.

빛나는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그 단호함에 감탄하면서도 꽃 진 자리에 남아 있는 쓸쓸한 무늬를 오래 들여다 본다. 어느덧 한 생에서 발시린 석양.온화한 경치처럼 세상 낮은 곳에 몸을 맡겨야 할 때다.

이정환 문화부장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