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성맹장염은 극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급히 수술을 받으면 대개 문제없이 치유된다. 반면 췌장암은 통증을 느낀 후 병원에 가면 십중팔구는 어렵다. 몸속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질병이 외상(外傷)이나 급성 질환보다 무섭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우리 몸의 질병처럼 경제사회에도 침체나 위기가 닥치게 마련이다. 서브프라임 사태처럼 지속가능하지 않은 자산 거품이 내재적 모순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함으로써 시작되기도 한다. 때로는 국제유가나 원자재 가격 폭등 혹은 전쟁 발발처럼 외부 충격이 예기치 않게 가해지기도 한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개 환부를 즉시 드러내는 유연한 경제 시스템이 사회주의처럼 경직적인 체제에 비해 더욱 강력한 회복력을 갖는다.

미국 시스템은 안팎에서 가해진 충격을 그때그때 반영하는 체제다. 경기침체로 총수요의 감소가 예상되면 기업들은 투자를 줄이고 인력을 조정한다. 실직자로 있으나 구직을 하나 별반 차이가 없는 유럽이나 한번 고용되면 실직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한국의 정규직에 비해 미국의 노동시장이 역동적인 이유다. 국제유가가 오르면 물가가 이를 반영하고 원자재 가격이 떨어지면 물가도 따라 떨어진다. 경쟁력이 없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기업은 망하고 혁신적이거나 창의적인 기업은 시장에서 인정받는다. 미국 파산법이 악용되고 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세계 어느 나라에 비해서도 '창조적 파괴'의 메커니즘이 잘 작동한다.

한국의 경제사회 시스템은 경직적이다. 환부와 상처가 곪아터질 때까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심지어 치료를 요하는 상태라는 진단을 받은 다음에도 다 함께 죽을지언정 혼자 망하지는 않겠다는 자세로 수술을 거부하고 끝까지 버티기 일쑤다.

정유,자동차,항공 등 주요 산업의 독과점 구조로 인해 주요 재화와 서비스 가격은 만성적으로 하방 경직적이다. 가격을 올릴 때에는 재빨리 올리지만 원가가 하락해 가격을 내려야 할 때조차 내리지 않는다.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업체의 경영진과 노조는 열등한 제품을 비싼가격에 판매해 얻은 이익을 나누기에 급급하다.

유학생과 주재원들이 해외로 수출된 우리 차를 역수입하면서 운송비,세금 다 내도 수백만원씩 남을 정도로 내 · 외국 간 가격차별이 극심하다. 우리 소비자에게는 비싸게 팔고 외국에서는 싸게 파는 데다 환율까지 높으니 수출은 잘 되겠지만 지금 위기 타개에 중요한 내수 진작은 포기해야 한다.

미분양이 16만채가 넘고 건설업체가 다 죽는다면서도 분양가 내릴 생각은 없다. 정부가 결국에는 돈 풀어 구원해주리라는 기대에 공급초과는 가격하락을 초래한다는 시장경제의 기본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제1차 건설 · 조선산업 구조조정안은 구조조정안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용창출 효과도 크지 않은 토목사업을 재개하고 부동산규제를 풀어서라도 토목건설업체를 연명시키려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중국의 기술유출 의혹만 남긴 쌍용차 역시 기업이 망하게 생겼는데 노조는 양보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사회적 파장을 생각해서 망하도록 놔두지 않을 테니 이대로 버티면 정부에서 국민세금 걷어 도와주리라는 계산이리라.외환위기 당시 기아차와 최근 미국의 자동차 3사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정부의 새 경제팀이 이번 봄 추진할 기업 및 산업 구조조정 기본방침을 발표했다. 다소의 부작용이나 아픔이 있더라도 부실기업 퇴출,독과점구조 개선,노조 개혁,공기업 경쟁력 제고 등 고질병에 과감히 메스를 대야 한다. 그래야 기업 간의 옥석이 가려지고 유동성 함정에서 벗어나 돈이 돌게 된다. 그래야 내수기반이 튼튼해지고 해외발 충격에도 견뎌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