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선 부조리한 인간

⊙ 죽음,피할 수 없는 운명

우리에게 「어린 왕자」로 친숙한 생텍쥐페리의 작품 중에는 조종사로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야간비행」이 있다.

1930년대 남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인간이 주어진 악조건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의지적인 존재임을 각인시켜주기에 충분했다.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어둠의 신비와 폭풍우 같은 여러 위험들 속에서도 결코 야간 비행을 포기하지 않는 우편 조종사들을 통해 불가능에 도전하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탁월하게 형상화했던 것이다.

물론 작품의 결말에서 조종사 파비앙은 그 어느 곳에도 착륙하지 못하고 생명을 잃고 만다.

그러나 그는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조차도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또한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하며 회피하지도 않는다.

끝까지 의지적인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대개 인간은 죽음을 공포와 회피의 대상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사후세계란 경험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거나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게 마련이고,그렇지 아니면 삶의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채 죽음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의지적인 존재로서의 모습을 잃고 어느 새 대단히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항상 죽음 앞에 서 있다.

따라서 죽음과 같은 한계가 목전에 있다고 해서 삶의 조건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 앞에 서 있다고 해서 삶의 의지를 꺾거나 주어진 운명을 회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의지를 잃어서는 안 되는 존재,그것이 바로 인간이며,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도 결국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 죽음 앞에 서게 되는 인간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20. 오상원「유예」
우리 소설에서 죽어가는 자의 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는 오상원의 「유예」를 꼽을 수 있다.

일단 이 작품은 6 · 25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전쟁 직후 창작되었다는 점에서 흔히 전후 소설로 분류돼 왔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전쟁 자체의 참혹한 비극성을 소재로 삼고 있다기보다 비극적 운명 앞에 놓인 한 개인의 의식과 그 의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품의 표면적인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6 · 25 전쟁 중 주인공이 이끄는 수색대는 적의 배후 깊숙이 침투하다 본대와의 연락이 두절된다.

그들은 북으로 진격하면서 몇 차례의 전투를 벌이지만 소대장만 겨우 살아남은 채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소대장은 불안과 절망,굶주림과 피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홀로 남쪽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인적 없는 황량한 마을에서 그는 인민군과 조우하게 되고 끝내 포로가 된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일관된 서술시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3인칭 시점으로 그려지는가 하면 1인칭 독백처럼 들리기도 하고,어느 순간에는 '그'가 '나'로 변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서술시점의 변화는 외부의 사건 못지않게 인물의 내면심리가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증명해준다.

특히 '그'가 포로가 된 후,다시 말해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는 시점의 변화가 더욱 심해지는데 이는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떤 반응과 행동을 선택하게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 죽음을 살다

아래 인용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총살형에 처해지는 장면인데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자.

눈에 함빡 싸인 흰 둑길이다.

오오 이 둑길……

몇 사람이나 이 둑길을 걸었을 거냐.

훤칠히 트인 벌판 너머로 마주선 언덕,흰 눈이다.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다.

똑바로 걸어가시오.

남쪽으로 내 닿은 길이오.

그처럼 가고 싶어하는 길이니 유감없을 거요.

걸음마다 흰 눈 위에 발자국이 따른다.

한 걸음 두 걸음 정확히 걸어야 한다.

사수(射手) 준비!

총탄 재는 소리가 바람처럼 차갑다.

눈앞엔 흰 눈뿐,아무 것도 없다.

인제 모든 것은 끝난다.

끝나는 그 순간까지 정확히 끝을 맺어야 한다.

끝나는 일초 일각까지 나를,자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걸음걸이는 그의 의지처럼 또한 정확했다.

아무리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걸음걸이가 죽음에 접근하여 가는 마지막 길일지라도 결코 허튼,불안한,절망적인 것일 수는 없었다.

흰 눈,그 속을 걷고 있다.

훤칠히 트인 벌판 너머로,마주선 언덕,흰 눈이다.

연발하는 총성,마치 외부 세계의 잡음만 같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는 흰 속을 그대로 한 걸음,한 걸음 정확히 걸어가고 있었다. (중략)

모든 것은 끝난 것이다.

놈들은 멋적게 총을 다시 거꾸로 둘러메고 본부로 돌아들 갈 테지.

눈을 털고 추위에 손을 비벼가며 방안으로 들어들 갈 것이다.

몇 분 후면 화롯불에 손을 녹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담배들을 말아 피고 기지개를 할 것이다.

누가 죽었든 지나가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모두 평범한 일인 것이다.

의식이 점점 그로부터 어두워 갔다.

흰 눈 위다.

햇볕이 따스히 눈 위에 부서진다.

- 오상원 「유예」


인용된 첫 부분의 뉘앙스를 유심히 살펴보면 아마도 인민군은 주인공인 '나'를 회유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처럼 가고 싶어하는 길이니' 같은 구절에서 회유를 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읽을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주인공 '나'는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의 의지를 꺾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글의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대개 사람들은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타자화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버스가 계곡에서 추락해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기적적으로 살아남겠지 하는 기대를 사람들은 은연중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인간은 죽음을 부정하고,죽음을 면하기 위해 발버둥치게 마련이다.

이렇게 보면 작품 속의 소대장 역시 죽음 앞에서 인민군의 유혹과 회유를 뿌리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의지'를 버리고 사는 것이 진정한 '나의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나는 일초 일각까지 나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다시 말해 '죽음'마저도 자기 의지를 펼칠 수 있는 삶의 한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 부조리한 운명을 넘어서는 삶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이 인간 삶을 가로막고 있다고 해서 삶 자체를 부정하거나 의미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행위가 곧 자살이다.

어차피 죽게 되면 삶이 의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고 삶이 지겹고 공허하게 느껴지게 된다.

또한 삶의 고통이 죽음 앞에서 사라진다고 느낄 때 '자살'은 인간 주위를 맴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삶의 부정이나 반대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죽음의 순간도 삶의 한 순간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의지를 잃지 않아야만 한다.

역설적이지만 죽음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인간 존재인 것이다.

죽음을 삶의 끝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죽음도 삶의 한 순간이라고 생각할 때 인간은 오히려 더욱 더 의지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한 창조」라는 짧은 그의 산문을 통해 인간이 존엄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에 대해 집요하게 반항하면서,또 그것이 불모의 것인 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노력을 계속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위대한 창조'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인간에게 요구하는 시련과 인간이 그 망령을 이겨내고 자신의 적나라한 현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

죽음을 피해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숱한 고행과 도전들을 포기하지 않고 극복해나간 이들의 삶은 그 자체가 한 권의 위대한 경전과 같이 여전히 그 생명력을 유지하게 된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