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의 한 대형 철강업체는 그동안 고철을 공급받던 일본 거래선과의 계약을 최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t당 7만8000엔 수준으로 1만t을 들여오기로 했지만 아무리 계산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창 고철이 모자라던 작년 초에 계약한 물량이라 가격이 너무 높았다. 반면 철강제품 가격은 작년 4분기 이후 폭락했다. 비싼 원료로 싼 제품을 만들 수는 없는 일.게다가 현물시장엔 훨씬 낮은 가격의 고철이 즐비했다. 그동안의 신뢰관계를 고려하기엔 상황이 너무 다급했다.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장기 거래선과의 '인연'을 끊는 사례가 늘고 있다. 조금이라도 싼 공급처를 찾으면 매정하게 발길을 돌린다. 길게 보면 손해라는 걸 알지만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한다. 불황의 시대,'의리'는 '사치'가 되고 있다.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장기 공급선을 바꾸거나 다각화하려는 모습은 조선업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작년 말 국내 A조선회사는 주요 해외 선주(船主)들과 '중국 투어'를 했다. 대형 중국 철강회사들을 돌아보며 선박용 후판(厚板) 생산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중국 제품에 대한 선주들의 불신을 없애자는 게 주 목적이었다.

회사 관계자는 "중국의 기술 수준이 한국과 일본 철강업체에 근접했다는 것을 확인시키자는 취지"라며 "선주들도 만족하는 눈치여서 앞으로 중국산 후판을 대폭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에 쏠려 있는 공급선을 중국으로 다각화하겠다는 얘기다.

B조선회사는 중국내 철강회사들이 국제 인증을 받을 수 있도록 자금과 기술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값싼 중국산 후판의 사용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선주들을 설득할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수십년간 거래해 온 한국과 일본 철강업체와의 관계가 걸리긴 하지만 선박 발주가 급감한 상황에서 수익성이라도 높이려면 중국산 제품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사상 최악의 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자동차업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동안 GM대우자동차는 내수 판매를 전적으로 대우자동차판매에 위탁해 왔다. 하지만 작년 하반기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틈이 벌어졌다. GM대우가 작년 11월부터 결제시스템을 '월단위'에서 '일단위'로 변경한 것이 도화선이 됐다.

이로 인해 대우자동차판매는 주문한 차량 대금을 매일 현금으로 결제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됐다.

남의 배신은 나의 기회

도요타자동차는 지난달 "생산비 절감 차원에서 앞으로 일본 내수시장용 차량에 포스코 자동차 강판을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미쓰비시 등 다른 일본 자동차업체도 포스코 제품 사용량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일본 자동차업계와 철강업계는 철옹성 같은 협력관계를 유지해 왔다. 일본 자동차업체들이 몇년 전부터 포스코 제품을 사용하긴 했지만 해외 생산공장에 국한됐다. 내수차량에는 무조건 일본산 철강재만 썼다. '일본 산업계의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신의를 지키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커졌다. 세계 1위 도요타는 작년 한 해 5조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했다.

신일본제철 등 일본 철강업체는 큰 충격에 빠졌다. 반면 포스코로서는 모처럼 찾아온 쾌거였다. 도요타의 '배신'이 포스코에는 '기회'가 된 셈이다.

미국 자동차업계 '빅3(GM 포드 크라이슬러)'도 기존 미국내 고정 거래선을 끊고 새로운 공급처를 찾고 있다. 이로 인해 가격경쟁력이 있고 품질도 양호한 한국 부품업체들의 해외 수주가 늘어나는 추세다. 작년 10월 이후로는 환율 급등으로 국내 자동차부품업체들의 가격 경쟁력이 더욱 높아졌다.

히드로공항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있는 영국공항공사가 최근 한국을 방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존 유럽내 원자재 업체들 대신 한국산을 사용하기 위해 사전조사를 하고 있다. 유럽제품은 너무 비싸고 중국산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판단에서다.

이한철 KOTRA 전략마케팅본부 이사는 "글로벌 기업들이 비용 절감 차원에서 기존 아웃소싱 기업과 관계를 끊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한국 기업에는 요즘 같은 시기가 새로운 거래선을 뚫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