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 지식인을 위한 변명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19. 김정한「모래톱 이야기」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은 잉여적인 존재이며,스스로 버림받은 존재'라고 규정한 바가 있다.

얼핏 생각하기에 이 말은 대단히 모순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의 진보를 가능하게 한 것이 늘 새로운 지식을 추구했던 지식인들의 몫이었음을 생각할 때 지식인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이며,사회를 이끌어가는 이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르트르는 왜 그다지도 모순된 진술을 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지식인의 태생적인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식인은 우선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갖춰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 동안 고급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의 태생은 보편적으로 중산층,다시 말해 부르주아 계층 이상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식인은 자신이 익힌 지식을 자신이 속한 특정 계층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회 전체의 이익,다시 말해 사회구성원 모두가 좀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좀 어려운 표현을 쓰자면 지식인은 당파적인 성향을 지니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기득권이나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는 이들과는 필연적으로 대결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다.

그는 태생이 다르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들에게도 배척당한다.

따라서 지식인은 사르트르의 표현대로 지배계층이 어쩌다 실수로 만들어낸 잉여적인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지식인이 지배계층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들은 자신이 깨달은 지식을 기존의 권력이나 기득권을 지닌 집단의 모순점을 파악하는 데 활용한다.

왜냐하면 지식인은 현재의 모순을 지적하고 항상 미래의 진보를 꿈꾸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인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사회 속에 존재하는 모순을 깨닫는 존재이다.

현재의 그 누군가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지만 보다 나은 역사의 진보를 위해 현재의 모순을 가장 먼저 느끼는 존재인 것이다.

마치 동굴 속의 카나리아처럼 타인에게 위험을 예고하는 존재,그가 바로 지식인인 것이다.

우리 소설 속에서 지식인이 소설의 주인공이 된 예들은 근대문학 초기에 이미 존재했었다.

춘원 이광수의 「무정」이 그러하고,염상섭의 「만세전」이나,심훈의 「상록수」 등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이광수의 「무정」은 식민지 근대화의 혐의가,염상섭의 「만세전」은 창백한 지식인의 모습이,심훈의 「상록수」는 현실성이 떨어지며 지나치게 로맨틱하다는 한계가 각각 존재한다.

이에 반해 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는 지식인의 현실적인 모습과 그 한계가 비교적 객관적으로 제시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모래톱 이야기

김정한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하촌」의 작가다.

그러나 작가 김정한에 대한 기록을 보면,그는 「사하촌」이라는 작품 때문에 집안이 수차례 피습을 당하는 등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들을 겪게 된다.

그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만 작가는 이후 오랜 세월 집필 활동에 나서지 않았고 그러다가 다시 발표한 작품이 「모래톱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K중학교 교사 '나'의 관찰자적인 시선에 의해서 전개되는데 여기서 '나'는 결국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자기가 살고 있는 섬이 실제 주민과는 무관하게 소유자가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를 쓴 건우라는 학생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나'는 가정방문을 계기로 건우 어머니와,윤춘삼씨,그리고 건우 할아버지인 갈밭새 영감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섬의 내력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된다.

주머니처럼 생긴 '조마이섬'은 일제 시대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였다가,해방 후에는 나환자 수용소로 변했고 그 후에는 모 국회의원이 간척 사업을 한다고 자기 땅으로 삼아 버렸다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건우를 포함한 섬사람들은 자기네 땅을 가질 수가 없었고 애써 땅을 일궜던 섬사람들의 삶은 빈곤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건우네도 할아버지 갈밭새 영감이 어부로 살아가면서 겨우 겨우 생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해 처서(處暑) 무렵,홍수로 섬은 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주민들은 둑을 파헤쳐 무너뜨리려고 했지만 유력자의 하수인들이 이를 방해한다.

갈밭새 영감은 섬을 구하기 위해 그들과 실갱이를 벌이고 그중 한 명이 급류에 휩쓸리게 되어 결국 갈밭새 영감은 살인죄로 구속이 되고 만다.

단순히 줄거리만 살펴보면 교사인 '나'가 관심 있는 학생을 가정방문하고,이를 계기로 섬의 실상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교사인 '나'는 섬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돕지도 않았을뿐더러 시종 관찰자적인 모습으로 일관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첫 시작과 마지막 부분에 대단히 의미 있는 구절이 존재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마지막과 첫 부분의 순서를 바꿔 제시해본다.

폭풍우는 끝났다.

육십 년래 처음이니 뭐니 하고 수다를 떨던 라디오와 신문들도 이젠 거기에 대해선 감쪽같이 말이 없었다. (중략)

그리고 구월 새학기가 되어도 건우 군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일기장에는 어떠한 글이 적힐는지?

황폐한 모래톱 - 조마이섬을 군대가 정지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 「모래톱이야기」 마지막 부분


"이십 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 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 별안간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교원 노릇을 해 오던 탓으로 우연히 알게 된 한 소년과 그의 젊은 홀어머니,할아버지,그리고 그들이 살아오던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 이들에 관한 그 기막힌 사연들조차,마치 지나가는 남의 땅 이야기나 아득한 옛이야기처럼 세상에서 버려져 있는 데 대해서까지는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

「모래톱이야기」 첫 부분


소설의 결말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조마이섬'의 비극은 어느 언론에서도 언급이 없었다.

수다를 떨던 라디오와 신문들은 침묵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언론은 소수자이면서 약자이고 또한 자기와 당파성이 다른 계층의 삶에는 무심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비록 이십 년이 넘도록 붓을 꺾어왔던 '나'이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묵묵할 도리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섬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치 남의 땅 이야기나 아득한 옛이야기처럼 버려져 있어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던 사르트르의 생각처럼 지식인이라는 존재가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때 그 모순을 지적하는 존재라면 작품 속에서 '나'는 지식인의 면모를 지녔다고 할 수가 있다.

모두가 침묵할 때 과감하게 작품을 창작해냈기 때문인 것이다.

⊙ 지식인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

어떻게 보면 지식인이라는 존재는 우리 사회에서 불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효율을 떨어뜨리며 당파적 이익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 계층의 이익만을 위한 행동이나 사고는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고 종국에는 그 사회를 파국에 이르게 할 것이 분명하다.

사회경제적인 소외는 결국 공공의 위협으로 변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지식인이 특정계층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그리고 과거나 현재의 기득권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위해 모순을 지적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인류 역사를 통해 볼 때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고 역사의 진보를 가능하게 했다.

생각해보라.

세종이 당대 기득권층이던 고루한 중화주의자들에게 이끌렸다면 훈민정음과 같은 미래지향적 산물이 나타났겠는가를.

지식인은 모순에 가득 찬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살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