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오른쪽 눈에 이슬이 낀 듯 사물이 뿌옇게 보였다.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차일피일 미루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내게는 이상한 자부심이 하나 있는데,그것은 내가 매우 시력이 좋다는 것이었다. 특히 시를 쓰는 데 있어 눈이 좋다는 것은 사물을 뿌리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축복같이 여겨졌다.

내게 질투심을 유발하는 시를 쓰는 시인조차 그가 안경을 쓰고 있으면 짐짓 저 친구의 시는 사물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만든 것이로구만 하며 위안을 삼곤 했다. 시인이 눈이 좋아야 사물을 수동적인 보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관찰로 대할 수 있고,그럼으로써 사물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은가.

아침에 일어나면 사물이 겹쳐보이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조간 신문을 읽는 수준이 됨에도 나는 이 이상한 자부심 때문에 안과에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우연히 길을 걷다가 먼지가 들어가서 왼쪽 눈을 감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오른쪽 눈으로 본 세상은 말 그대로 무중풍경(霧中風景)이었다. 코 앞까지 온 세상이 안개로 뒤덮여 발걸음조차 옮길 수 없었다. 시력이 나빠진다는 것을 시쓰기의 저주로까지 생각하고 있던 내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이런 지경이 되는 동안 단 한번도 여자에게 윙크 한번 한 적이 없었단 말인가. 사랑스러운 사람과 만나면서 그에게 왼쪽 눈을 찡긋이라도 했으면 반대쪽 눈이 나빠지고 있음을 깨달았을 텐데 말이다. 사물을 잘 본다는 자부심은 사물을 사랑하고 그것들과 하나가 되는 시적 감수성의 원천이 되어왔는데,실제로는 습관과 교만에 젖어 사물을 내 식으로 판단하고 있었다는 자괴감까지 들었다. 결국 나는 안과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양쪽 눈 모두 백내장이었으나 다행히 왼쪽 눈은 생활을 하는 데 불편함이 없다는 진단 결과가 나왔다. 오른쪽 눈 수술 날짜를 받아놓고 며칠 동안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면 그간 한번도 해오지 않았던 윙크를 왼쪽 눈으로 하며 뿌옇게 변한 세상을 멋적게 바라보았다.

헬렌 켈러의 글에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산문이 있다. 이 글은 태어나 열아홉 달 만에 시각과 청각을 잃었으나 세상을 손끝으로 듣고 손끝으로 보았던 이 위대한 여성이 53세 때 쓴 수필이다.

헬렌 켈러는 자신이 단 사흘만이라도 앞을 볼 수 있다면 그 시간을 셋으로 나누어 쓰겠다고 말한다. 첫째날에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삶을 가치있게 해준 사람들과 가까운 동물에게 바치는 것,둘째날에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들러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공부하느라 보내는 것,셋째날에는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며 보내는 것.위의 글은 우리가 생활하면서 눈을 얼마나 무심하게 사용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우리는 아름다운 숲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고도 별 것 없다고 하면서 세상을 가득 채운 색채와 율동의 파노라마를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 빛의 세계에서 '시각'이란 선물이 삶을 풍성하게 하는 수단이 아닌,단지 편리한 도구가 되고 있을 뿐이다.

며칠 후 백내장 수술을 받고 나니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시력은 많이 회복되었다. 그간 나는 눈이 좋다는 믿음으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상의 이치를 내 눈의 좁은 잣대로만 재단해왔다. 시를 쓰는 것도 그렇다. 내가 만일 사흘 동안만 눈이 먼다면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많은 것들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헬렌 켈러의 말대로 우리 자신이 눈이 먼 사람처럼 눈을 사용한다면 모든 사물들이 소중해서 어루만지고 끌어안을 것이다. 그때야 우리는 제대로 보게 될 것이며,새로운 세상의 아름다운 세계가 우리들 앞에 그 문을 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