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와 소통이 단절된 채 파편화된 가족의 현실



⊙ 가족의 실상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18. 이호철「닳아지는 살들」

밤 9시 뉴스의 시청률을 좌우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8시30분쯤 방영되는 일일연속극이다.



이 시간은 대개 저녁식사를 마치고 가족들이 거실에 앉아 TV를 함께 보거나 과일 등을 나눠 먹으며 바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잠시나마 휴식을 얻는 때이다.



그런 까닭에 대부분 연속극의 소재들은 가족 구성원을 모태로 한 서사구조를 이루게 마련이다.



연속극에서 다뤄지는 공간도 거실이나 주방,안방과 같이 집안이 주를 이룬다.



요즘 들어서는 소재의 선정성 문제가 거론되기는 하지만 일일연속극 속에 등장하는 가족은 대부분 단란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비쳐지거나 적어도 이를 지향하는 듯 그려진다.



한마디로 일일연속극은 스위트홈의 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연속극 속의 가족은 위기나 갈등도 가족구성원 전체가 지혜롭게 해결하려 노력한다.



특히 이때 가장의 역할은 중요하게 부각되며,집안 어른들 역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때가 많다.



문제는 방송이 현실을 반영한다 하더라도 과연 연속극 속의 가족을 보편적인 가족 모델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이호철의 「닳아지는 살들」 속의 가족만큼은 드라마 속 스위트홈과는 무관한 듯 보인다.

이호철의 「닳아지는 살들」은 「무너앉는 소리」 3부작 중 제 1부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이들 연작을 통해 현대 사회의 가족 해체 문제와 부조리한 인간 삶의 모습을 조명하는 데 집중한다.



그는 가족을 단란하고 다정하며 상처를 서로 위로하는 스위트홈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속력도 지니지 못한 채 분열과 해체로 점철되어 피상적인 사회적 구성단위로 전락한 가족을 제시한다.



한국 사회가 전쟁과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가족의 부침이 심했던 역사적 경험을 지닌 것을 반추할 때 작가 이호철의 문제의식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 공허한 기다림

작품 「닳아지는 살들」은 일일연속극처럼 주요 공간이 거실과 방 안으로 설정되어 있고 등장인물도 집안 사람들로 한정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연속극처럼 스위트홈의 신화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은행 고위직을 은퇴한 칠십을 넘긴 집주인은 얼마 전 정신을 놓고 거실에 앉아 20년 전 북으로 시집 간 큰딸을 기다린다.



전쟁과 분단으로 큰딸의 귀환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정신은 현실과 완전히 유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집주인의 모습은 마음 속에 고향을 묻어야 했던 월남 1세대의 정서적 혼란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집안의 외아들 성식은 아버지의 기다림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는 매우 수동적인 인물이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인텔리이지만 직장을 구할 생각이 없는 창백한 지식인의 전형이다.



성식의 아내인 정애도 역시 부조리한 가족의 현실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는 무기력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이 집의 가족들에게는 삶에 대한 의지나 욕망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극중 서술자인 막내딸 영희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부조리한 상황을 자각하고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언니가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기에 가족들의 모습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자각이 능동적인 실천의지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가 가족들에게 내뱉는 말들 역시 무의미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사돈지간인 선재와 공유하며 그와 함께 무기력한 현실을 탈출하고자 시도한다.



선재는 언니의 시동생이지만 분단 이후 정처를 잡을 수 없어 집안의 식객처럼 눌러 살게 된 인물이다.



선재 또한 부조리하고 생기 없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써 보지만 술에 취한 채 영희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 이상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역시 수동적이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처럼 「닳아지는 살들」의 모든 인물들은 가족이면서도 대화와 소통이 존재하지 않는 파편화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분단과 이산(離散)으로 인한 큰딸의 부재에서 연유한다.



큰딸의 부재가 비정상적인 아버지를 만들었고 이것이 집안의 암울한 분위기를 형성하게 했던 것이다.



작품 속에서 분명하게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현대사회의 파편화된 인간관계 역시 가족을 소통 불능의 상황으로 빠져들게 했음이 분명하다.



성식은 큰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에게 아무런 책임이나 연대의식을 지니지 않고 있고,정애도 시아버지에게 정성을 쏟을 뿐 다른 가족들에게 냉정하기는 마찬가지다.



전후 갑작스럽게 진행된 도시화와 산업화는 현실사회를 소외와 무관심이 만연하도록 만들었고 결국 이러한 분위기가 가족단위로까지 스며든 것으로 볼 수 있다.

⊙ 초조와 불안의 상징

「닳아지는 살들」에는 같은 가족이 아닌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이 집의 식모다.



그녀는 같은 가족이 아니기에 가족을 풍자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순간 벽시계가 열두 시를 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일제히 시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안이 술렁술렁해졌다.



시계를 쳐다보던 세 사람의 시선이 다시 늙은 주인 쪽으로 향했다.



코앞의 사마귀를 만지던 늙은 주인이 어리둥절하게 아들과 며느리와 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복도로 통한 문이 열리며 방안의 불빛이 복도 건너편 흰 벽에 말갛게 삐어져 나갔다.




열두 시가 다 쳤다.



네 사람의 시선이 그 쪽으로 옮겨졌다.



조용했다.



왼편 벽으로부터 서서히 식모가 나타났다.



히히히히 하고 이상한 웃음을 띄우고 서 있었다.



제딴에 미안하다는 뜻인 셈이었다.



"벤소에 갔었시유."하고 말했다. (중략)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도 식모를 내다보는 영희의 눈길은 적의(敵意 · 적대감)로 타오르고 있고,아버지는 영희의 부축을 받으며,저리 비키라는 것인지,혹은 어서 들어오라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게 한 손을 들어 허공에다 대고 허우적거리고,성식과 정애도 엉거주춤하게 의자에서 일어서 있었다.



"꽝 당 꽝 당" 그 쇠붙이 소리는 밤 내 이어질 모양이었다.

-이호철,「닳아지는 살들」

열두 시.



결국 하루가 지났지만 기다리던 사람은 오지 않았다.



대신 '식모'가 무의미한 기다림을 조롱이라도 하듯이 등장한다.



순간 기다리던 주체들은 동정과 연민의 비극적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아버지로 표상되는 이산의 현실과 소시민들의 소외와 소통 불능의 세계가 작품 속에서 비판되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작가는 이러한 상황이 쉽게 극복되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있는 듯하다.



'꽝 당 꽝 당'이라는 초조와 불안을 고조시키는 쇠붙이 소리가 여전히 지속될 것처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중간중간에 삽입된 '꽝 당 꽝 당' 쇠붙이 소리는 불안 속에서 기다림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가족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 가족의 복원이 필요한 까닭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TV 드라마 속의 스위트홈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역경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서로 슬기롭게 헤쳐나가고 언제나 다정다감한 모습만 가득하다면.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짧은 시간 담소를 나눌 만큼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생계를 책임지는 것만으로 힘이 부치는 가장이 있는가 하면,입시와 구직의 문제로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자녀들도 있다.



「닳아지는 살들」의 가족들이 분단과 이산으로 인해 파편화된 것 못지않게 현실을 살아가는 가족도 소통 부재와 소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족공동체가 붕괴되는 파국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족은 사랑과 나눔을 학습하는 가장 원초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나'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은 오로지 가족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닳아지는 살들」이 이산(離散)을 겪은 특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가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인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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