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자본확충펀드가 정부 발표 후 1개월이 넘도록 출범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과감한 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은행의 자본을 선제적으로 보강하겠다는 취지로 설립이 추진됐지만 건설 · 조선사에 대한 1차 구조조정 결과가 발표된 이후에도 펀드 설립은 제자리걸음이다. 펀드 규모와 운영 방식도 당초 계획에서 상당부분 수정되면서 금융당국이 시장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 아니냐는 비판과 함께 시장 신뢰까지 잃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개월 넘게 협의만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올해 업무보고를 하면서 20조원 규모의 자본확충펀드 설립을 올 1월까지 끝내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정작 투자자 구성을 위한 한국은행 및 산업은행과의 정책 협의는 한 달 가까이 지난 1월 중순에 시작됐다. 또 펀드 구성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최종 합의가 계속 늦어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시중은행의 후순위채를 매입하면 최소 5년 이상 자금이 묶여 고정화된 대출이 될 뿐 아니라 중앙은행의 특성상 손실을 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한은 관계자는 "한은 대출은 최장 1년이며 차환할 수도 있지만 장기로 끌고 갈 수는 없다"며 "정기적으로 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산업은행도 자본확충펀드에 출자를 하게 될 경우 자기자본 비율이 하락하면서 대외 신인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용보증기금이 신용을 보강하는 방안도 강구되고 있지만 보증 한도와 손실 가능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상황이다. 한은 관계자는 "오는 12일 열리는 금융통화위원회에서도 의결이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해 실무 논의가 쉽지 않음을 시사했다.

◆은행들은 외면

자본확충펀드가 자본건전성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다는 금융당국의 주장과 달리 정작 은행들은 외면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금융감독원의 지시로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 비율을 12% 이상 쌓은 은행들로서는 추가적인 자본 확충이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경영권 간섭에 대한 우려도 지원을 꺼리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에 따라 신한 국민 하나 등 시중은행들은 지원 신청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고,신한지주는 조만간 최대 1조5000억원의 증자를 추진하겠다고 밝힐 정도로 자본확충펀드와 거리를 두려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돈을 받겠다는 곳은 정부가 소유권을 갖고 있는 우리 · 기업은행과 사실상 정부가 통제권을 가진 농협 수협 등 특수은행뿐이다. 금융위에서는 우리은행 2조~2조5000억원,농협 1조~1조2000억원,기업은행 5000억~7000억원,광주 경남은행 각각 2000억~3000억원,수협 1000억~2000억원가량의 지원 신청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실기(失期)한 정책(?)

금융권에서는 자본확충펀드가 채권안정펀드처럼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면서 사실상 실패한 정책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펀드 규모와 자본 조달 및 투입 방식 등 당초 정부가 발표한 계획에서 상당히 많은 수정이 가해지고 있다"면서 "사실상 자본확충펀드의 구조를 다시 짜고 있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정부의 금융정책에 대한 신뢰도에 의문이 제기되고 혼선만 가중시키면서 '아마추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도 "애초에 한은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아 협의가 늦어지고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며 "정책의 생명이 타이밍과 신속한 집행이라는 점에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는 그러나 지난달 워크아웃 개시 결정이 내려진 건설 · 조선사의 여신 위험도를 반영해 자기자본 비율을 정확히 계산해야 정확한 수요를 파악할 수 있는 만큼 타이밍을 완전히 놓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이달 중순까지는 한은 등과 합의를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심기/박준동/정재형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