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되면 오랜만에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일 것이다. 이때 괴로운 사람들은 더 이상 노총각과 노처녀들이나 대입 낙방생들이 아닌 듯하다. 그들에게는 '골드족'이라는 새로운 닉네임이 붙었거나,미래의 '블루칩'이라는 기대가 가능하니까. 오히려 가장 괴로운 사람들은 대학 졸업 예정자들이 아닐까. "취직은 했니?"라는 질문은 그들을 '두 번' 죽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 2월 대졸자는 55만6000명인데,그 중 55%가 취업이 어려울 것이란다. 예년에는 대학 졸업 예정자의 70% 정도가 노동시장에 진입했던 것에 비하면 8만명 정도가 감소하는 셈이다. 취업의 질도 낮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대학 5학년은 필수,대학 6학년은 선택,대학원은 교양'이라고 한다. 취업에 필요한 종합선물세트식 스펙을 갖추기 위한 고육지책일 터이다.

한 일간지에 연재했다가 최근 단행본으로 출간한 '문학터치 2.0'의 첫 장 제목이 '청년백수 전성시대'인데,독하고도 불온한 현실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런 식이다. "넌 매일 놀면서 무슨 돈으로 먹고 사냐? 그러니까 조금씩 먹잖아.많이 벌어서 많이 먹으면 되잖아.그거나 이거나. "(구경미,'봉덕동 블루스') "(허벅지를) 만지는 게 나쁜 게 아니다. 그러고 고작,천원을 주는 게 나쁜 짓이다. "(박민규,'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 "요즘 계급을 나누는 건 집이나 자동차 이런 게 아니라 피부하고 치아라더라."(김애란,'도도한 생활')

생뚱맞겠지만 요즘 의외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TV 드라마 '꽃보다 남자'가 떠오른다.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지만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이 드라마가 10대뿐만 아니라 20~30대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이유가 혹시 부자에 대한 선망과 상류 계층에 대한 관음증적 욕망 때문인 것은 아닐까. 순정남인 데다가 부자이기까지 한 것이 아니라 부자인 데다가 순정남이기까지 한 남자를 거부하기에 우린 너무 가난하다.

이런 현상을 반영하는 또 다른 통계는 최근 결혼정보회사에 여대생들의 회원 가입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불황기에는 결혼을 취업으로 생각한다는 소위 '취집(취직+시집)' 현상이 유행한다지만,그 연령대가 점점 낮아져서 대학교 2,3학년 여학생들도 직접 가입한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제목으로 '꽃보다 돈'이 더 어울릴 이 드라마는 더 이상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젊은이들의 소비적 향락을 반영한다. 생산보다 소비에 의해 정체성을 형성하면서,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도전하기보다는 부러움과 패배의식을 일상화한다. 그럴수록 부자에 대한 판타지는 더욱 강해진다. 누군들 돈을 벌지는 않고 쓰고만 싶지 않을 것인가.

이런 맥락에서라면 예전에 인기 있었던 CF의 "부자되세요"라는 말은 사어(死語)가 될 수밖에 없다. 요즘에는 귀족집단인 드라마 속 F4처럼 처음부터 부자로 태어나야만 부자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자는 '되는 것(becoming)'이 아니라 부자로 '존재하는 것(being)'처럼 오인된다.

돈은 태양과 같다. 멀리 가면 얼어 죽고,너무 가까이 가면 타 죽는다. 돈 없이도 잘 산다는 말은 위선이고,돈밖에 믿을 것 없다는 말은 위악이기 쉽다. 그러나 위선이나 위악도 웬만큼 여유가 있을 때 부리는 것이다.

작년 4분기 GDP가 외환위기 이후 10년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서서 성장을 멈추었다는 통계가 발표되고 있는 만큼 올해에는 모쪼록 각 가정으로 황금송아지들이 떼로 몰려오면 좋겠다. 부자로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반드시 부자가 되겠다는 젊은이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년 설이 두렵지 않도록.다시,새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