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후 5시반. 현대차 전주공장. 비슷한 작업복을 입은 조합원들이 연이어 노조 사무실 앞 대로로 줄을 맞춰 나왔다. 각 대열의 맨 앞에는 깃발이 있고 공장별로 질서 정연하다. 확성기에서는 민중가요가 계속 흘러나왔고 사회자의 톤이 높은 목소리도 쉬지를 않는다. 주간연속 2교대 시행을 촉구하는 집회다. 1천명은 족히 넘어 보인다. 집회가 열리는 광장 뒤편으로는 수십대의 관광버스도 보인다. 울산 공장에서도 대의원들이 버스를 타고 전주에 왔다. “이게 무슨 짓인지...” 한 노조 관계자가 집회가 한창인 무대 뒤에서 말을 건다. 허탈한 표정이다. 집행부도 알고 있다. 실제 파업을 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것을. 현대차 노조의 현 집행부는 고민이 많았다. 지난해 임단협 때는 사상 초유로 노노갈등으로 임금협상이 무산되기도 했고 성과가 없다고 윤해모 지부장은 사퇴압박도 받았다. 윤 지부장은 지난해 11월 임기를 올해까지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최대 성과인 주간연속2교대를 책임지겠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런데 돌발상황이 터졌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실물경기가 급격히 하강했고 전세계 자동차 라인이 섰다. 도요타는 올 1분기 50%의 감산을 결정했다. 현대차는 30%, 기아차도 24%를 줄여 잡았다. 법정관리를 신청한 쌍용차는 라인이 섰다 돌다를 반복하고 있다. 솜씨 좋던 영업사원들도 요즘은 놀고 있다. 지난해 주간연속2교대 문제의 노사 쟁점은 줄어드는 근무시간으로 부족한 생산량을 어떻게 메울지였지만 지금은 생산할 물량이 없다. 재고를 쌓아둘 야적장도 부족하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특히 어떻게든 책임지고 하겠다던 현대차 노조 집행부에게는 더 그렇다. 결국 선택은 파업 결의다. 전대미문이라는 말이 정말 딱들어맞는 어려운 경제여건이지만 조합은 ‘정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실제 파업에 들어가는 지?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현명한’ 조합원들이 찬반투표에서 부결시킬 수도 있다. 실제 파업에 들어간다면? 여론의 뭇매에, 정부의 압박에 노조 자체가 무너질 위험도 있다. 파업을 결의한 노조 집행부에서도 ‘현명한’ 조합원이 필요한 때이다. 주간연속2교대 쟁점은 임금문제로 바뀌어가는 것 같다. 회사측은 16일 협상에서 주야 각 8시간 기준의 임금지급을 전제로 시행안을 제시했다. 당초 약속은 잔업시간을 포함, 주야 각 10시간 기준의 임금지급이었다. 노조는 일단 거부했지만 회사측이 시행안을 밝힌 것은 긍정적이라는 평가다. 8시간 기준 임금지급이면 당초 안보다 대략 월평균 35만원 정도를 덜 받는다. 회사측 안보다 더 받으려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외치고 합의대로 이행하라고 버텨야 한다. 수십대의 관광버스와 수천명의 조합원이 모인 집회도 필수적이다. 협상의 기술이다. 지난 87년 깃발을 든 현대차 노조는 지난해까지 단 두해를 제외하고 거의 매년 파업을 했다. 1년에 평균 보름은 파업으로 공장이 섰다. 생산차질은 110만대. 금액으로는 11조원이 넘었다. 하지만 언론 보도처럼 꼭 그만큼 손해는 아니다. 파업 때 못만든 차는 이후 잔업과 특근으로 메웠기 때문이다. 정확히 따지면 파업으로 고객들의 대기시간이 좀 길어지고 정규 근로시간에 만들 차를 시간급이 1.5배인 잔업시간에 만드니 인건비가 조금 올라가는 손해가 생긴다. 협상의 손실이다. 하지만 매년 보름동안 공장에서 집회하는 대신 휴가를 갔다면? 현대차 공장은 정말 세계 최고의 공장이 됐을 것이고 현대차 공장은 가장 가고 싶은 직장 1순위에 꼽혔을 것이다. 회사측도 노사 협상에 들이는 막대한 경영자원 손실을 피할 수 있다. 협상의 기술을 쓰느라 혐상의 손실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숱한 파업을 통해서 현대차 노조가 지금의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파업이라는 카드를 안썼다면 가끔 언론에서 욕을 먹는 고임금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위상이 너무 올라 가끔 비판도 받는 현대차 노조는 이제는 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주간연속2교대 문제를 노사가 서로 간에 진지하게 마음을 열고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면? 수십대의 관광버스도, 수천명의 집회도 필요하지 않다. 강경한 협상 제스처는 필요없다. 노사간에 서로 신뢰만 쌓이면 말이다. 사측의 태도 변화도 전제돼야 한다. 노조는 동반자라는 인식의 전환이 우선돼야 한다. 매번 깃발을 들어야 노조의 얘기를 듣는 것도 문제다. 어쩌면 현대차 노사는 서로의 대결에서 마지막 설 자리가 협상의 절충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대화를 통해 만든 절충점에서는 최소한 반 보 이상이 더 있다고 경험을 통해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협상의 손실은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꼭 어쩔 수 없는 손실인가? 16일 오후 현대차 전주공장 집회. 준비한 앰프가 고장이 났는지 가끔 사회자의 목소리를 전달하지 않았다. 노래도 가끔 끊겼다. 커다란 앰프가 증폭시킨 민중가요는 집회가 열띤 것처럼 분위기를 잡아줬다. 그러나 앰프가 몇초라도 꺼지면 집회장소는 갑자기 고요해졌다. 천여명의 조합원중 노래를 따라 부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조합원은 현명했다. 박성태기자 stpark@wowtv.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