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옷을 벗겨주세요/내 옷을 벗겨주세요/네,서두르지는 말고요/너무 빨리는 말고요/나를 탐내고/나를 갈망하고/나를 사로잡아야 한다는 걸 명심하세요//다른 남자들처럼/너무 바쁘게 굴진 마세요/먼저 그윽하게 쳐다보세요/애무의 시간은 거칠어서도 사나워서도 안돼요.

아,이 웬 낯 뜨거운 장면이란 말인가? 이것은 프랑스의 가수이자 배우인 줄리엣 그레코(1927~)의 '내 옷을 벗겨주세요'라는 곡의 노랫말이다. 얼핏 통속 대중가요의 퇴폐적인 가사로 치부해버릴 수 있는 이 노랫말은 사실은 한 시대의 문화적 기념비이다. 이 노래가 나온 것은 1968년 프랑스의 5월 학생운동 발발 직후였다. 5월 혁명으로도 불리는 이 학생운동은 낭테르대(현 파리10대학) 여학생 기숙사에 남학생 출입을 금지한 데 대한 불만이 계기가 되어 전국적인 반체제,반문화 운동으로 비화된 혁명적 사건이다.

그레코의 이 노래는 '구속 없는 삶을 즐겨라''금지라는 말만이 금지된다'와 같은 5월 학생운동의 기치가 된 반문화 운동,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해방 및 여권 확대의 열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랑을 나누는 데 있어서 능동적 입장을 취해선 안 되고 남자의 야수적 본성에 자신의 몸을 맡겨야 했던 인습의 '희생자' 여성의 성적 권리를 주장하는 이 노래는 전통적 사랑관을 뒤집는 혁명적 계기가 되었다. 이 노래가 발표되고 난 직후에 나온 세르즈 갠스부르와 제인 버킨 듀엣의 '나도 당신을 사랑해'(Je t'aime moi non plus)에선 한걸음 더 나아가 여성의 성적 헤게모니가 주장된다.

샹송계의 '살아있는 전설' 그레코는 무대를 통해 권위주의와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며 저항운동의 최전선에서 늘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이러한 반체제적,반문화적 끼는 파리 생 제르맹 데 프레의 진보적 지성을 먹고 자란 것이다.

경찰관이던 아버지와 무심한 엄마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레코는 1945년 엄마가 두 딸을 팽개치고 해군에 입대하자 파리로 가 생 제르맹 데 프레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는다. 그레코는 그곳에서 폭발적인 지적 열기와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갈망을 목도하게 된다. 전후의 생 제르맹 데 프레는 몽파르나스를 대신하여 지식인과 예술인의 아지트가 되었고 생 제르맹 데 프레 교회 주변과 렌 거리에 늘어선 카페와 캬바레,재즈 클럽은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예술을 갈망하는 이들로 넘쳐났다.

당시 생 제르맹 데 프레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 사상의 진원지였다. 추상적인 본질의 세계보다는 현재의 삶을 중시하는 실존주의는 단순한 철학의 영역을 넘어 문학 미술 음악 신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유 형식과 표현 양식에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전후 프랑스인의 삶의 양식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다. 실존주의의 만연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가져온 비인간화 현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됐고 자신들이 제멋대로인 우주에 버려진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실존철학을 주창한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무한한 자유를 부여받았지만 우리를 바람직한 행동으로 유도하는 절대적인 힘(신의 의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그때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해야 하는 고독한 존재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러한 선택 행위는 전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염두에 두는 성실한 선택이어야 하며 거기에는 책임이 뒤따른다고 보았다. 여기서 그는 지식인의 현실 참여의 당위성을 제기한다. 실제로 사르트르는 모든 권력과 권위를 배격한 채 철저한 자유인으로 살았다. 또 평생을 인간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스스로도 그러한 자유로운 삶을 원했다. 그는 생전에 자동차 한번 가져본 적 없고 장례식도 없이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도덕과 상식의 이름 아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던 기성체제에 반감을 갖고 있던 그레코에게 그것은 하나의 복음이었다. 때마침 '퐁-루아얄' 바에서 사르트르를 만나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운명적이었다고나 할까? 사르트르의 제의로 그레코는 실존주의자들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며 그녀는 이 새로운 사상을 자기 삶의 강령으로 삼게 된다. 실존주의자들은 '카페 드 플로르'와 '레 되마고'에 모여 새로운 사상의 가능성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을 인도하는 사제였기 때문일까? 당시 모임의 멤버들은 저마다 검정색 옷을 즐겨 입었다. 남성들은 검정색 폴로 스웨터를 입었고 여성들은 짧은 치마에 남성들이 쓰는 베레모를 썼다. 그레코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정색 패션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실존주의 사상은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되어 사람들은 저마다 실존주의자가 되려고 했고 실존주의적 삶을 살고자 했다. 철학적 원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대중에게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삶의 방식으로 비쳐졌다. 사람들은 실존주의자들의 삶을 흉내 내 검정색 패션을 즐기고 관습에 대한 도전과 반항적 태도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역사상 철학이 대중에 이렇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적은 없었다.

그레코는 1947년 도핀 거리에 새로 문을 연 카바레 '타부'와 '로즈 루즈'(붉은 장미)에 출입하면서 이곳 사교계의 중심 인물이 된다. 지나치게 심각하며 반항기가 농후한 이 매력적인 여성은 머지 않아 전통적 가치에 반발하며 자유로운 삶에 열광했던 전후 파리지앵의 상징적 존재가 된다. 파리의 소녀들은 그레코의 패션을 모방,저마다 끝단이 좁은 검정색 바지와 몸에 꼭 끼는 검정색 스웨터를 입었다.

1949년 캬바레 '지붕 위의 황소'에서 사르트르의 노래로 가수로 데뷔한 이래 그레코는 노래를 통해 실존주의적 삶을 몸소 실천했다. 그녀는 사르트르가 펜으로 그랬듯이 노래를 통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유롭게 하고자 했다. 경쾌함과 우수,관능과 지성이 겸비된 그레코의 매력적인 음색에 실린 노랫말은 관객의 가슴에 희망을 주입했다. 때로는 프랑스 문학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뮤즈가 되어,때로는 시민권 향상의 전사가 되어,다른 한편으로는 반독재의 기수가 되어 이 생 제르맹 데 프레의 '검은 물고기'(그레코의 애칭)는 언제나 무대를 뜨겁게 달궜다. 피노체트가 칠레의 독재자로 군림하던 시절 산티아고 공연에서 배짱좋게도 군부독재를 비난하는 노래를 불러댄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다. 생 제르맹 데 프레는 사르트르로 인해 지성의 월계관을 쓰게 됐고 그레코로 인해 세련된 감성의 휘장을 두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파놓은 영광의 샘물은 오늘의 프랑스 문화와 예술의 든든한 자양분이 되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생 제르맹 데 프레를 걷는 내게 그레코는 속삭인다. '당신의 타성의 옷을 벗어요!'

정석범(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