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역사에 남는 역작 꼭 남길겁니다"

"이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요. (웃음)"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44 · 사진)가 온라인게임을 만드는 이유다. 송 대표는 세계 최초 온라인게임인 '바람의 나라'와 온라인게임의 신화를 일군 '리니지'를 만든 대표적인 1세대 온라인게임 개발자다. 해외 유명 게임 컨퍼런스에 단골 연사로 초청받을 정도로 세계 게임 업계에서의 명성도 여전하다. "잘 하는 걸 해야 잘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겸손해 하는 그에게서 온라인게임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 묻어났다.

천재 개발자로 손꼽히는 송 대표를 서울 삼성동 엑스엘게임즈 본사에서 만났다. 길게 기른 머리를 머리띠로 쓸어넘긴 특유의 모습 그대로였다. 청바지 차림도 여전했다. 누가 봐도 40대로 볼까 싶은 외모였다. 인터뷰를 시작하자 서글서글하던 눈빛부터 달라졌다. 시종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쏟아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나와 KAIST 전산학 석사 과정을 마친 송 대표는 1993년 한글과컴퓨터에서 한글프로그램 '한텀' 개발에 참여하면서 정보기술(IT) 업계에 발을 내디뎠다. 김정주 넥슨홀딩스 대표와 대학시절부터 친분을 쌓아온 인연으로 1995년 넥슨을 공동 창업했다. 그리고 최초의 온라인게임인 '바람의 나라'를 개발했다. 어렸을 적부터 게임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일반 소프트웨어 분야는 레드오션인 데 반해 아직 싹도 트지 않은 온라인게임은 블루오션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97년에는 엔씨소프트로 옮겨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리니지'를 만들었다. 전 세계 4200만명의 게이머들을 매혹시킨 리니지에는 늘 송 대표의 이름 석자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송 대표는 2003년 리니지 개발자 3명과 의기투합해 엑스엘게임즈를 세웠다. 온라인게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판타지 소설가 전민희씨가 게임 스토리를 쓰고 있고 1996년부터 리니지를 함께 만들었던 김민수씨가 그래픽을 맡고 있어요. " 그가 요즘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MMORPG 얘기다. "20대 후반과 30대 연령층을 겨냥한 게임을 만들고 있어요. 리니지는 너무 오래 해서 재미 없고,월드오브워크래프트(WOW)는 어렵게 여기는 그런 사람들이요. 느긋하고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 겁니다. " 또 18세 등급을 받는 것에 개의치 않을 만큼 틀에 얽매이지 않고 게임을 만든다고 덧붙였다.

게임 스토리는 인간의 복잡다단한 면을 파헤치는 내용이라고 했다. 자기모순적이고 온갖 고뇌와 번민으로 점철된 인생처럼 흑백으로 가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고,자신의 행복이 다른 세계의 누군가에게는 불행이 되기도 하는 현실 세상을 게임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송 대표는 유명 패키지 게임인 '파이널판타지'와 '드래곤퀘스트'가 그가 그리고자 하는 게임 세계관을 담고 있다고 했다. 복잡다단한 스토리를 MMORPG로도 능히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내용을 부러 넣지는 않겠지만 성인 취향의 게임을 만들다 보면 에로나 폭력이 들어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만큼 자유롭게 게임을 만들고 있다는 얘기다.

"레벨을 올리는 도중에 퀘스트가 됐건 사냥이 됐건 특이한 걸 넣고 싶어요. 다만 이를 오용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이디어를 다 살리지 못할 뿐이죠." 남들과 다른 MMORPG를 만들고 싶어하는 건 모든 개발자들의 꿈이기도 하다. 송 대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경험으로 송 대표는 게임개발자들이 꾸는 꿈의 한계도 잘 알고 있다. "아이디어를 기술적으로 표현하기 어렵거나 아이디어는 좋지만 실제로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가 상존하게 마련이지요. 이 때문에 온라인게임들의 상당수가 진부한 게임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

상당수 게이머들이 MMORPG가 엇비슷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뭘까. 송 대표는 장르적 특성 때문이라고 규정한다. "홍콩 느와르라는 영화 장르는 쌍권총,비련의 여주인공 등의 장르적 특성이 있잖아요. MMORPG라는 장르를 규정하는 기본 요소들이 다 나와야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거죠.물론 새로운 시도를 계속 해야겠죠."

송 대표가 유독 MMORPG에 집착하는 것은 아직 추구할 것도,발전할 여지도 많다는 이유에서다. 아직 보여줄 게 많다는 얘기다.

그런 그도 차기작의 공개 시점을 잡는 데는 신중하다. "바람의 나라,리니지를 만들던 시절에는 게임 자체가 블루오션이었고 경쟁자도 없어 게임을 시장에 내놓는 것 자체가 중요했어요. 게임을 서비스하는 도중에 모자라는 부분을 보완하거나 수정해도 탈이 없었죠.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어요. 해마다 수십개의 온라인게임이 쏟아져 나오는데 완성도가 떨어지면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

쓰라린 실패의 경험 탓일까. 엑스엘게임즈가 첫 작품으로 내놓은 레이싱게임 'XL1'은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주목을 받았지만 결국 흥행에는 실패했다. 송 대표는 그 이유를 완성도가 떨어져서라기보다는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뮬레이션을 열심히 해가며 물리학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레이싱카를 만들었지만 재미가 없는데 뭘해요. " 그는 나중에 물리학 이론도 적용되면서 재미도 있는 레이싱 게임에 다시 도전해볼 생각이다.

송 대표가 보는 온라인게임 미래는 밝다. 그는 "게임도 영화처럼 주류 엔터테인먼트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영화가 100년의 세월을 거치며 자리를 잡은 것에 비하면 온라인게임은 아직도 발전 여지가 많다는 생각에서다. 온라인게임의 역사는 이제 10년 밖에 안됐기 때문이다. "상업적인 영화도 있고 예술영화,독립영화도 있듯이 게임도 다양한 장르로 분화될 거라고 봅니다. 소수가 모여서 만드는 감동적인 예술 게임도 생길 거고,블록버스터 같은 대중적인 게임도 나올 거예요. 어릴 때부터 게임을 하고 자라온 세대들이 성인이 되고 있기 때문에 게임이 생활의 일부가 되는 걸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TV나 영화처럼 될 거예요. " 그는 MMORPG에도 공포물이나 스릴러물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게이머들이 채팅창에 누가 범인이라고 밝혀버리면 재미가 없어져버릴 테니 아직은 긴장감이 팽팽한 스릴러물을 MMORPG로 만들기는 어려워요. 머잖아 이런 부분도 기술적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될 겁니다. "

송 대표의 꿈은 원대하다. 일류 역사에 길이 남는 역작을 꼭 만들겠다는 것이다. 리니지로 세계 게임 역사에 이름을 올렸지만 아직 성에 차지 않아서다. 그는 "게임 마니아들에게 최고의 게임이라는 칭송도 듣고 싶고,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