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구조조정을 총괄한다는 채권금융기관 조정위원회(이하 조정위)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대가 참으로 큰 것 같다. 위원장 인선에만 한 달 이상 걸렸고,설 연휴 이전에 기업 구조조정의 옥석이 가려질 것이라는 설이 나도는 것만 봐도 조정위가 큰 일을 해낼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생긴 비슷한 기구(기업구조조정위원회)가 큰 칼을 휘둘렀던 기억이 조정위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을 만들어낸 것 같다. 실제로는 조정위가 구조조정 대상 기업에 대한 등급(ABCD)산정에서 채권단 간의 이견을 조율할 권한조차 없는데도 과대포장되고 있는 셈이다.

기업에 대한 등급 평가야말로 구조조정의 핵심 사안이다. 건설사와 조선사 구조조정과 관련,주채권은행은 현재 111개 기업에 대해 등급을 나누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결과에 따라 일시적 유동성 부족 기업(B등급)엔 신규 자금을 지원하게 된다. 부실징후기업(C등급)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넣고,부실기업(D등급)은 채권회수 등을 통해 퇴출시킨다.

현행 기업구조조정촉진법 시행령엔 조정위의 업무를 △신용공여액 및 의결권 행사와 관련된 이견 △채권재조정 및 신규 신용공여의 분담비율 결정과 관련된 이견 △그 밖에 협의회의 의결로 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하는 사항 등 세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채권단 등급 평가 이후의 신규 지원 여부,규모,배분 및 채무재조정 등에 대한 의견차만 조율하는 것으로 한정하고 있을 뿐 기업의 생사를 가르는 역할을 조정위가 맡은 것은 아니다. 채권단이 조정위에 등급 판정을 맡기자는 합의가 나오지 않는 한 구조조정은 첫 단계에서 공전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조정위는 처음부터 '면피용 얼굴마담'에 그칠 것이라는 얘기가 적지 않게 나왔다. 권한과 책임을 갖고 기업 구조조정을 과단성있게 처리하기 보다는 나중에 문책을 당할 것을 우려하는 공무원들과 은행원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분산시키기 위해 조정위를 만든 것 아니냐는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금융감독당국과 채권단이 조정위를 통해 민간 자율의 구조조정을 정말로 추진하겠다는 생각이라면 조정위가 실질적 권한을 갖고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김현석 경제부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