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시인>

내게는 욕심이 과해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떠올리는 문장이 있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 빛나는 점을 보라.그것은 바로 여기,우리 집,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아는 사람,소문으로 들었던 사람,그 모든 사람은 그 위에 있는,또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숭상되는 수천의 종교,이데올로기,경제이론,사냥꾼과 약탈자,영웅과 겁쟁이,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왕과 농민,서로 사랑하는 남녀,어머니와 아버지,…(중략) 성자와 죄인 등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총합이 여기에,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 "

실제로 '창백한 푸른 점'은 1990년 2월에 태양계 외곽에 도달한 우주탐사선 보이저 1호의 카메라가 포착한 지구의 모습이다. 약 64억㎞ 밖에서 바라본 지구는 푸르스름한 먼지띠에서 희미하게 떨고 있는 작은 점에 불과하다. 무인우주탐사선이 보내온 전송사진에 따르면 그렇다는 말이다.

만약 외계인들이 태양계에 근접해 지구를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에도 우리가 믿는 것처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유일한 생명체를 지닌 축복받은 별일까. 그들이 아무 생각없이 바라본다면 지구는 수성이나 목성과 구별할 수 없는 태양계에 딸린 작고 보잘 것 없는 변방 행성에 불과할 것이다. 이와 같이 멀리 떨어진 조망대에서 본다면 지구는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정이 다르다. 우리가 우리의 사고를 먼곳으로 이동시켜 '나'와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그곳이 태양계 바깥의 은하계이든,미래의 먼 시간이든,멀리 이동된 공간을 통해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겠지만,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 스스로의 중요성에 대한 과신이나 남들보다 어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망상 때문에 일을 그르칠 때가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외로운 티끌 하나에 불과한 엷게 빛나는 저 '창백한 푸른 점'을 떠올려 본다. 지구도 광대한 우주의 무대 위에서 하나의 극히 작은 무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티끌에 불과한 무대가 우리 삶의 소중한 터전이다. 그곳에는 나와 더불어 모든 것이 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식물들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참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존재란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결이 안 되는 만들어짐의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 안의 결여를 채워주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없고서는 참다운 생명에 대한 각성이 있을 수 없다. 그러한 타자에 대한 관심이 사랑이다. 헤르만 헤세는 "우리 시대를 못 믿게 될수록,인간이 일그러지고 메말랐다는 생각이 들수록,나는 그러한 비극을 극복하는데 그만큼 더 사랑의 마력을 믿는다"고 말했다.

현대적 삶의 일차적 이미지라 할 수 있는 깨끗함,편안함,매력 등의 반대쪽에는 오염,심리적 스트레스,약물 중독과 고향 상실이 도사리고 있다. 미래를 향해 숨돌릴 틈없이 진행되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게 발생되고 있다. 현대화란 개발이라는 동전의 한쪽 면만을 보고 달리던 인간들이 쉽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것만을 갈구하는 모순적 상황을 통칭하는 단어일지 모른다.

그동안 인간은 하늘에 닿기 위해 끝없는 욕망을 키워왔다. 선진국 사람들이 그러했다. 그런데 이제 지상을 향해 다시 내려오려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본 것은 '그 위는 텅비어 있는' 모습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현재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제는 위만 보지 말고 옆의 우리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줄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