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가 터 잡은 곳에서 42년간 포장지 만들기 한우물
국내 특수종이업계 선두주자


경기도 안양시 호계동에 있는 영창의 생산공장.6600㎡ 남짓한 내부에선 방습지 제조기가 빠른 속도로 돌아가며 종이와 필름을 서로 붙였다. 직원들은 쉴 새 없이 두루마리 형태의 제품을 옮겼다. 마당에서는 출고를 기다리는 차량 엔진 소리가 요란했다. 조창현 대표(35)는 "반세기가 가깝도록 이사 한번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며 "30년 넘게 일한 직원들도 지금까지 변한 게 별반 없다고 말할 정도"라고 말했다. 영창은 조능환 창업주(1996년 작고)가 설립한 뒤 2대 조재진 회장(2007년 작고)을 거쳐 현재 3대 조창현 대표까지 이어지며 42년간 포장용 종이만 생산해 왔다. 이처럼 한자리에서 한우물을 파 온 기업도 드물다.

그렇다고 기술 개발을 등한시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국내 최초로 물이 스며들지 않는 방습 포장지는 물론 자동차용 에어필터, 오일필터에 들어가는 여과지 ,금속의 녹을 방지하는 방청지 등을 개발한 특수지업계 선두 주자다. 연평균 약 7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국내 200여 기업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조능환 창업주(1914년생)는 1930년대 말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 상과를 졸업하고 당시 유명한 유통회사였던 화신(화신백화점)에 입사,수입지를 판매하는 일을 맡았다. 1940년대 중반 삼양펄프(아세아제지 전신)로 옮긴 이후 지인의 동업 제의로 1960년대 초 삼진알미늄을 설립했다. 하지만 창업주는 얼마 뒤 본인의 지분을 정리해 1966년 안양 호계동에 영창가공지를 세우고 종이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조창현 대표는 "할아버지는 알루미늄 사업이 맞지 않아 자신 있었던 종이 사업에 투신키로 결정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영창은 1970년 중반 이후 방습 포장지로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경제개발 붐을 타고 설탕과 밀가루 등 경공업 제품이 많이 생산됐지만 마땅한 포장재가 없었다. 기존 포장지는 습기에 약해 제품 포장에 적합하지 않았다. 창업주는 합성수지를 만들고 남은 폴리프로필렌에 방수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돼 이를 입힌 방수지 개발에 착수했다. 수개월간의 연구 끝에 1972년 폴리프로필렌 방습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물건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3남 중 막내였던 조재진 회장(1946년생)이 가업을 잇기 위해 회사에 들어온 것도 이맘때다. 애초 가업을 물려받기로 했던 큰형이 유학 중 펄프회사에 일자리를 구해 미국에 정착하는 바람에 조 회장이 가업을 이어야만 했다. 둘째 형은 의대에 다녀 사업을 물려받을 형편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조 회장은 대학(연세대 경영학과 65학번) 졸업 후 가려 했던 유학을 포기하고 1969년 총무부장으로 회사에 들어왔다.

조 회장은 입사하자마자 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국내 자동차산업이 태동하고 있을 무렵인 1975년 자동차용 필터지를 개발하는 데 성공,안팎에서 인정받았다. 당시 자동차용 필터지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품목이었다.

필터지가 섬유가 섞인 펄프라는 것을 알게 된 조 회장은 천을 만드는 공장에서 주워 온 천 조각이나 헌옷 등을 잘게 자르고 섞어 원단을 만들었다. 입사 35년째인 이중원 공장장(55)은 "예나 지금이나 제지회사 최고의 노하우는 재료배합 비율이기 때문에 누구도 제조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며 "회장님은 '미친놈' 소리를 들어가며 연구에 매달렸다"고 소개했다. 직원들과 공장에서 먹고 자며 개발한 제품을 지금까지 현대 · 기아차와 쌍용자동차,GM대우자동차 등에 공급하며 연간 5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사실상 회사를 총괄하다시피 한 조 회장은 연로한 부친을 대신해 1991년 가업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조 회장은 과로한 탓인지 대표이사에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 초기 위 · 신장암 진단을 받았다. 1991년 1차 수술 후 16년간 투병 생활이 계속됐고 이후 1993년 합병증으로 2차 수술,2005년에는 위암 재발로 위장 전부와 간 일부를 제거하는 3차 수술을 받았지만 병마를 이겨 내지 못하고 2007년 끝내 사망했다.

조 회장의 1남2녀 중 첫째인 조창현 대표는 "아버지는 수술 직전까지도 주위에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고 해외 출장을 다닐 정도로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 와 있으면서도 일에 파묻혀 사는 아버지를 아들로서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선친의 손때가 묻은 목장갑을 물려받아 제 손에 끼고 가업을 이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조 대표는 대학(서울대 응용화학부 93학번)을 졸업한 뒤 3년간 다니던 컨설팅 회사를 그만두고 2003년 무역부 과장으로 회사에 발을 디뎠다. 미국 UC버클리에서 입학 허가를 받은 MBA 과정도 포기했다. 조 대표는 "대를 이어 온 회사를 문닫게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암 재발 후 2년여를 한 달 중 보름은 항암 치료를 받던 조 회장이 숨진 2007년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그는 "앞으로 재활용이 가능한 친환경 포장재 등 회사의 사업 영역을 확장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며 "4대를 잇는 기업을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