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에 눈을 감은 현대인

⊙ 눈먼 자들의 도시 - 타인과 소통을 단절하다

[강영준 선생님의 소설이야기] 15. 김승옥「서울,1964년 겨울」
얼마 전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영화가 상영됐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어서 영화적 해석에 부담이 따랐는지 그다지 훌륭한 평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조용한 반향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고 본다.

원작이나 영화 모두 그 주제가 인간의 존엄성이 어디까지 지켜질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있어서 갈등과 경쟁이 극심하고 소통이 부재한 요즘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날 갑자기 도시인들에게 눈이 머는 현상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일부 시민들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인 줄 알았지만 이내 도시 전역으로 마치 전염병처럼 확산되자 정부는 이를 억제하기 위해 눈먼 자들을 격리 수용하게 된다.

격리된 그들은 이후로 생존과 인간적 가치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작하게 된다.

잠자리를 서로 차지하려는 것부터 시작해서,음식물을 두고 서로 다투는가 하면,종국에는 폭력적인 세력이 나타나 모든 것을 독점하고,이를 통해 자신들의 재물욕과 성욕을 충족하는 경우까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작품 속에 나타난 현상은 물론 현실세계에 대한 상징이다.

배려와 관용은 실종된 채 개인의 욕망만 들끓는 현실사회에 대한 극단적 상징인 것이다.

급속한 산업화와 경쟁적 사회환경은 현대인에게 타인을 돌아보게 할 여유를 주지 않고 있다.

또한 근대 이후 타인의 존재보다는 주체의 인식이나 판단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흐름 역시 타자에 의한 시선 자체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그 결과 현대인의 자기 중심성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도 과단 경쟁이 갈수록 심해지는 현재의 사회경제적 환경에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될 여지가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이처럼 타인을 바라보지 않고,타인의 시선을 무시하는 현대인에 대한 탁월한 은유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우리 소설에서 현대인의 자기중심성과 타인에 대한 몰이해를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김승옥의 '서울,1964년 겨울'을 들 수가 있다.

1964년.

그 해는 4 · 19혁명으로 세워진 민주정부가 쿠데타에 의해 전복된 지 3년이 흐른 해였고,베트남 파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였으며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이 이제 막 실행된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이 시절 젊은이들은 허탈과 허무에 휩싸인 채 삶의 방향성을 상실해 버린 경우가 많았다.

삶의 현실에서 좌절을 맛본 젊음들은 선술집에서 서성거리며 세월을 보내는 일이 허다했던 것이다.

정치사회적 불안과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도시화 속에서 연대는 끊어졌으며 개인은 극도로 파편화된 채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타인에 대한 시선이 남아 있을 리가 있겠는가.

⊙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1964년,서울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비교적 단순한 서사구조로 되어 있다.

스물다섯 살의 구청 공무원 '나'는 같은 나이의 대학원생 '안'을 우연히 만나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우선 '나'는 시골 출신으로 사관학교 시험에 떨어져 박탈감과 소외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물이며,이에 비해 '안'은 유복한 대학원생이지만 삶에 대한 뿌리 깊은 냉소를 지닌 인물이다.

둘은 술을 그만하고 일어나려는 순간에 아내의 시체를 실험실 해부용으로 판매했다는 또 다른 사내를 만나게 된다.

그는 자신은 서적 판매원이며 죽은 아내의 시체를 해부용으로 팔아서 생긴 돈을 오늘 밤 안에 다 써 버리려 하니 같이 있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렇게 셋이서 돈을 쓰던 사이 어디선가 불길이 일어나고 사내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아내가 타고 있는 듯한 환각에 사로잡혀 남은 돈을 손수건에 싸서 불 속에 던져 버린다.

이후에 '나'와 '안'은 각자 돌아가려 했지만 사내는 그날 밤 혼자 있기가 무섭다고 간절히 요청하게 되고 결국 셋은 함께 여관에 들기로 한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점은 등장인물 세 사람이 서로 술잔을 기울이고 음식을 나눠 먹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익명적인 존재 이상의 의미를 타인에게 부여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특히 '나'와 '안'은 뭔가 진지한 의도를 지니고 이야기를 하려 했다가도 이내 주관적이고 자의식적인 상황으로 빠져들다가 마침내는 사소하고 의미 없는 일상의 농담을 주고 받기에 이르고 만다.

둘은 철저히 파편화된 개인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 비해 서적 외판원 사내는 자신의 고뇌를 진솔하게 제시하고 이를 함께 나눌 것을 요청한다.

고통을 나눠 인간적 연대를 모색하려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부탁은 끝내 무시된다.

⊙ 타인의 고통에 눈을 감다

"방을 한 사람씩 따로 잡을까요?"

여관에 들어갔을 때 안이 우리에게 말했다.

"그게 좋겠지요?"

"모두 한방에 드는 게 좋겠어요"라고 나는 아저씨를 생각해서 말했다.

아저씨는 그저 우리 처분만 바란다는 듯한 태도로,또는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다는 태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중략)

"난 아주 피곤합니다"

안이 말했다.

"방은 각각 하나씩 차지하고 자기로 하지요"

우리는 복도에서 헤어져 사환이 지적해 준,나란히 붙은 방 세 개에 각각 한 사람씩 들어갔다. (중략)

다음날 아침 일찍 안이 나를 깨웠다.

"그 양반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안이 내 귀에 입을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예?"

나는 잠이 깨끗이 깨어 버렸다.

"방금 그 방에 들어가 보았는데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중략)

나는 급하게 옷을 주워 입었다.

개미 한 마리가 방바닥을 내 발이 있는 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그 개미가 내 발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얼른 자리를 옮겨 디디었다.

밖의 이른 아침에는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빠른 걸음으로 여관에서 멀어져 갔다.

김승옥,「서울,1964년 겨울」

인용된 부분은 소설의 결말 부분이다.

외판원 사내의 딱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안'과 '나'는 그의 고뇌와 고통을 나눠 갖기를 거부한다.

사내의 죽음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도와주길 거부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혹시나 말썽이 생길 것을 생각하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려 한다.

'개미가 혹시 발을 붙잡을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에서 타인의 불행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편익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눈먼 자들의 도시'의 결말 부분을 상기해 보자.

마지막 장면에서 어느 노인의 내레이션 중에 '우리는 눈이 멀어버린 것이 아니라 보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서울,1964년 겨울'에 대입해 보면 '안'과 '나'는 외판원 사내의 고통과 예견된 죽음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그저 모른 척하고 외면해 버렸다고 정리할 수가 있다.

⊙ 타인, 그 연대와 소통의 가능성

철학자 레비나스는 '고통은 인간 상호간의 윤리적 전망을 열어준다'고 전한 바가 있다.

타인과,타인의 고통에 무심하게 살아가는 것은 경제적인 삶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연대를 불가능하게 하고,모든 인간이 불행할 수 있다는 개연성에 비춰볼 때,파국으로 치달을 여지가 농후하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경우에서처럼 말이다.

따라서 인간은 윤리적 연대를 늘 모색해야 하며 그것은 타인과 고통받는 타인을 외면하지 않는 윤리적 실천으로부터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은 '나의 자유'에 선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나,소설 '서울,1964년 겨울'은 '나'의 자유와 타인에 대한 책임회피를 먼저 생각할 때 어떠한 파국이 도래하는지를 명백히 제시해준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