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캄캄합니다. 하지만 위기를 뚫고 나가야지요. 우리에겐 외환위기도 정면 돌파한 저력이 있잖습니까. "

최근 만난 국내 한 완성차 업체 임원은 넋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글로벌 수요 위축으로 새해 전망이 암울하지만,적극적인 판매 확대만이 해법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2009년은 자동차산업의 위기가 깊어지는 한 해가 될 전망이다. 경기 침체가 본격화하고 있어서다. 외환위기 때는 수출 확대로 돌파구를 찾았지만 지금은 해외 시장이 더 어렵다. 하지만 완성차 업체들은 고연비 신차를 출시하는 등 불황기 맞춤 전략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겠다는 방침이다.

◆신년에 짜는 사업계획

완성차 업체들은 해가 바뀌었는데도 신년계획조차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 완성차 업체들이 해를 넘겨 새해 계획을 짜는 것은 초유의 일이다. 그만큼 경기상황이나 환율 등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현대.기아자동차는 글로벌 시장 상황이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불투명하다는 점을 감안,올해 1분기 이후에나 신년계획을 확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올해 사업계획을 짜고 있지만,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있다"며 "세부 사업계획은 올 4월께 확정짓기로 했다"고 말했다.

현대.기아차는 작년 한 해 동안 당초 목표였던 480만대보다 훨씬 적은 약 420만대를 판매했다. 하지만 해외 재고가 106만대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해 올해 판매목표를 최대한 보수적으로 잡고 있다. 업계에서는 경기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현대.기아차의 올해 판매대수가 2007년 수준(396만대)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오는 4일까지 전 공장이 휴업하는 GM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는 최근 사업계획을 다시 수립했다. 하지만 수정 가능성이 많아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 이 회사는 작년 9월 신년 사업계획을 짰지만,GM 본사의 유동성 위기 및 국제유가 급등락 등 외부 변수로 인해 폐기했다. 회사 관계자는 "예년 같으면 한 해 생산 및 판매계획 등을 이미 밝혔겠지만,비상경영 상황이어서 그럴 처지가 못 된다"고 설명했다.





◆외환위기 이후 최악될 듯

올해 완성차 업체들의 수출 및 내수 판매는 외환위기 이후 최악이 될 전망이다. 국산차 수출은 작년보다 5.6% 감소한 255만대를 기록하면서 2년 연속 감소할 것으로 한국자동차공업협회는 예상했다.

특히 북미지역과 서유럽,동유럽,중남미 수요가 대폭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자동차 수출액은 작년 502억달러에서 올해 465억달러로 줄어들 것으로 분석됐다.

고용 불안과 자산가격 하락 등의 영향으로 내수 판매는 작년보다 8.7% 감소한 105만대에 머무를 전망이다. 이것이 현실화하면 외환위기 직후였던 1998년(78만대) 이후 11년 만의 최저치다.

차종별로는 버스 트럭 등 상용차가 더 큰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상용차 내수 판매는 작년보다 11.3% 줄어든 17만3000대에 그칠 것으로 예측됐다. 경기 침체가 깊어지면 건설업종과 중.소 서비스업종이 훨씬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점에서다.

올해 신차는 최대 10여종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 새로 내놔봐야 팔리지 않을 게 뻔한 만큼 출시 시기를 아예 늦추겠다는 업체들이 많기 때문이다.

완성차 업체들이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점도 신차 출시를 뒤로 미루는 또 다른 배경이다. GM대우는 올 7월 및 10월로 예정했던 준대형 승용차와 다목적 차량의 출시 시기를 각각 1년 이상 미뤘다. 대주주인 상하이자동차가 자금 지원을 하지 않는 한 부도가 불가피한 쌍용차도 올해 계획했던 중형 세단의 출시를 사실상 백지화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위기상황에도 불구하고 완성차 업체들은 올해 고연비 신차를 선보이고 유연한 근무체제로 전환해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위기 때 미리 준비해야 위기가 걷혔을 때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중.소형차 경쟁력을 갖고 있는 현대.기아차는 고연비 소형차 라인업을 더욱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또 올 7월 액화석유가스(LPG) 기반의 하이브리드카를 처음 선보이기로 했다. 아반떼 하이브리드는 일반 휘발유 모델보다 10%가량 비싸지만 연비가 50% 이상 높은 게 특징이다. 연비는 ℓ당 17.4㎞로 이를 같은 열당량(熱當量)의 휘발유로 환산하면 ℓ당 21.3㎞에 달하는 셈이다.

현대차에 이어 기아차도 올해 말 포르테LPI 하이브리드를 내놓기로 했다. 현대.기아차는 가격이 저렴한 LPG 기반 하이브리드카를 호주 중국 유럽 등에 수출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완성차 업체들은 불황기에 적합한 신형 경차도 적극 출시할 방침이다. 기아차는 올 3월께 모닝을 개조한 LPG 경차를 선보인다. GM대우도 올 하반기에 깜찍한 디자인의 경차 M300을 새로 내놓는다. 작년 1월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비트'란 이름의 컨셉트카로 호평받은 모델이다. 배기량 1000㏄로 연료 효율성이 뛰어나다. GM대우는 같은 차량의 LPG 모델도 내놓기로 했다.

완성차 업계의 근무 시스템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시장 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근무체제가 속속 도입되고 있다.

기아차는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카니발 수요가 줄어듦에 따라 작년 말부터 경기 광명 소하리 1공장에서 프라이드를 혼류 생산하기 시작했다. 화성공장에서 만들어온 오피러스 역시 올 4월부터 소하리 1공장에서 추가 생산할 계획이다. 1공장에서 SUV와 소형 승용차,대형 승용차를 한꺼번에 생산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쏘렌토와 모하비를 만드는 화성 1공장에서도 올해 초부터 포르테의 혼류 생산에 나선다. 현대차 역시 울산 2공장에서 다양한 차종을 같은 라인에서 만들 수 있도록 설비 공사를 진행 중이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