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화 평론가>

연말이 되니 출판계에서는 '올해의 책'을 선정하거나 한 해 베스트셀러의 경향을 진단하기에 바쁘다. 모 대형서점의 통계에 따르면 영어 관련 실용서가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는 와중에서도 그동안 약세였던 문학 출판이 강세로 돌아섰고,소설 분야의 경우 일본소설의 유행이 한풀 꺾이고 한국 소설의 인기가 부활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겉으로 보기에는 사뭇 다른 두 권의 소설을 함께 읽으면서 올 한 해 사회의 분위기를 가늠하게 된다.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그 소설들이다. '상처받지 않은 청춘은 가치가 없다'는 황석영의 성장담과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신경숙의 모성론이 동시대와 만나는 점은 과연 어디일까?

흔히 사회가 어려울수록 과거를 되돌아보며 힘과 용기를 얻는 성장소설이나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자기 치유서가 인기를 끈다. 과거에서 현재를 보는 복고나 향수(鄕愁) 자극형의 문화가 부각되는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미래지향적이고 새로우며 모험적인 이야기보다는 잊고 있었던 과거를 재발견하는 성찰적 이야기가 시대 분위기와 맞춤하게 어울리기 때문이다.

두 소설은 모두 과거에 대한 '기억'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소설들 속에서는 상처를 찌르는 '창'이자 그것을 막아주는 '방패'로서의 기억의 양가적 기능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개밥바라기별'은 자전적인 청춘 고백록이다. 거기에는 문학을 위한 일탈이 있고,실패가 있다.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를 잃어버린 딸과 아들,남편,심지어 엄마 자신의 엄마에 대한 기억의 재구성이 중심에 있는 소설이다. 거기에는 엄마를 온전한 인간이나 여성으로 보아주지 못했던 가족들의 후회가 있고,반성이 있다.

황석영은 말한다. "이담에 역사에 물어보라 하는 건 다 헛소리요. 사람들이 기억을 하려고 노력을 해야지요. " 그 결론은 '사람은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신경숙은 말한다. "엄마의 실종은 그가 까마득히 잊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 속의 일들을 죄다 불러들였다. " 그 결론은 '엄마를 잃어버렸을 뿐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럴 때 기억을 통해 여러 번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물론 망각할 줄 모르는 인간은 신경증에 걸리기 쉽다. 혐오스럽고 자기 파괴적인 과거는 망각하는 것이 좋다. 오래된 예시지만 영화 '동사서독'에서 모든 것을 잊게 해준다는 술 '취생몽사'를 통해 드러나듯이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아팠던 기억을 망각해야 한다. 잊지 못하는 것도 병이다.

하지만 정반대로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확인되듯이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으면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다. 이 영화에서 진짜 인간과 복제 인간을 구분하는 중요한 질문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으면 말해보시오'이다. 이식(移植)된 회상이 아니라 경험된 기억으로서의 과거 자체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좋은 추억은 약이 된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망각이냐 기억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망각하고 무엇을 기억하느냐이다. 부정적인 것은 빨리 잊고 긍정적인 것은 오래 간직해야 한다. 기억도 노력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진다. 성장의 고통처럼.엄마의 부재처럼.무엇보다도 우리는 과거에 대한 소모적인 울분보다는 생산적인 애도가 더욱 필요할 정도로 절박한 시대를 통과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불에 덴 손으로라도 불의 속성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기억의 연금술이다. 아프고 낡아 보이지만 그만큼 절실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