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섀클턴이란 사람을 아시는지.100년 전 남극점 정복에 나섰다가 실패한 탐험가다. 하지만 그는 실패와 관계없이 조국 아일랜드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부빙(浮氷)에 난파된 26명의 대원을 634일간의 고초 끝에 한 사람의 낙오 없이 모두 구출해낸 영웅이어서다. 끝없는 얼음 바다와 벌판,수 천m 높이의 얼음 산을 헤맨 기록은 세계적인 스테디셀러가 됐고,그의 뛰어난 지도력은 데니스 퍼킨스 박사에 의해 '서바이벌 리더십'이라는 경영론으로 재탄생됐을 정도다.

섀클턴의 이야기를 꺼내든 것이 새삼스럽긴 하다. 하지만 그가 난파선을 떠나며 대원들에게 한 연설은 지금도 가슴에 새겨둘 만하다. "절망하지 않는 한 우리는 살 수 있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구하겠는가. 움직여야 산다. "

엄동설한이다.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하다는 금융위기의 추위는 그야말로 살을 에는 것 같다. 추우니 어쩌겠는가. 모두가 코트 깃을 여민 채 한 구석에 앉아 눈만 굴리는 수밖에.미동조차 없다.

무엇보다 기업들의 움직임부터가 그렇다.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들은 물론이다. 대기업들마저 복지안동(伏地眼動)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 투자하라는 경영 구루(guru)들의 충고는 위기 때면 늘 그렇듯 무용지물이다.

MB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당장이라도 투자에 나설 것처럼 얘기하던 기업들의 투자소식은 여전히 감감하다. 지난 8월 1%대로 주저앉은 설비투자증가율은 이제 마이너스의 가능성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위기를 맞아 투자를 줄줄이 연기하거나 취소하는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4개 가운데 1개 기업 이상이 투자를 줄였거나 축소를 검토하고 있다는 최근 한 경제단체의 조사 결과는 아직 초기 반응일 뿐이다. 대부분 기업이 현금을 챙겨 내년 이후를 살펴보겠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기업 주변의 경기가 주택가보다 더 싸늘하다는 소식은 위기 상황에 기업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망각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소나기는 피해가는 게 맞다. 하지만 이번 비는 소나기가 아니라 장맛비다.

움직여야 하는 건 정부나 통화당국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움직이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다. 보다 선제적이고 과감하게 움직여야 한다. 찔끔찔끔할 때가 아니다. 하지만 선제적인 조치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수시로 청와대 서별관 회의가 열렸지만 신속한 대책은 나온 적이 없다. 철저한 후행성이다. 금리 인하나 은행채 매입 같은 초강력 카드도 시장에 패를 모두 읽힌 뒤 발표하니 효과를 제대로 발휘할 리 없다.

정부는 이미 금융시장에 대한 조치를 끝냈어야 했다. 이제는 위기를 기회 삼아 1997년 외환위기 때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완벽한 구조조정 방안을 논의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국회를 보면 더 한심하다. 강만수 내쫓는 일을,쌀 직불금 타먹은 동료의원 찾아내는 일을,'MB 졸개'들을 꾸짖어 난장판을 만드는 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정체된 집단'이 아닌가.

윤용로 기업은행장이 28일 사내방송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른 아침 기회의 강을 건너려면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길을 떠나야 한다. 모두가 공포에 떨며 움츠릴 때 적극 대응해서 성장 발판을 선점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 전적으로 공감한다.

김정호 경제부장 j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