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기봉 < 시인 >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산 95번지는 내 포도밭 주소다. 이곳에는 달빛을 좋아해 달빛포도나무라고 불리는 아내 같은,애인 같은 포도나무 900여 그루가 만삭의 꿈을 꾸며 오순도순 살고 있다.

그 나무 사이사이에 작고하신 김춘수 나무를 비롯하여 정현종 조정권 이문재 박주택 박상순 고두현 문태준 등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유명 시인들의 나무 20여 그루가 있다. 이 나무들은 모두 자기 가슴에 시를 한 편씩 달고 있다.

'한 여름 점심 때/ 옻 술을 마신다/ 넘어가는구나/ 목으로 넘어 가는구나/ 계곡 물소리를 내며'라는 시 <물소리>가 걸린 정현종 나무,'혼자 피고/ 진/ 꽃,/ 아니 오래 전 내게/ 배송되기 전에/ 져버린 꽃/ 져 버린 채 온 꽃/ 고맙다는 마음/ 아직도/ 발송인을 찾지 못한'이라는 <그 꽃>이 걸린 조정권 나무….

시인의 이름표를 단 포도나무들은 나무가 아닌 멋진 서정 시인으로 변해 있다. 그들은 풀벌레,새,바람에게 시를 읽어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나무에 달려 있는 까만 포도송이 같은 시에 놀라고,아무리 찾아봐도 나무에 포도가 없어 또 놀란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다니….그럼 시가 포도를 먹어 버렸나? 포도밭에서 삼겹살이나 구워 먹을 줄 알았지 이렇게 멋진 시가 나무에 걸려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으리라.

다음 주말에는 포도밭에 와서 시를 마음에 담아 가시라.포도는 돈을 내야 먹지만 시는 돈을 내지 않아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경제적인가.

올해부터는 축제에 살이 뽀얗게 붙어 볼거리들을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다. 잔치 이름도 근사하게 하나 지었다. '포도밭 예술제.' 오는 30일 오후 2시30분부터 행사가 시작된다. 의미 있는 행사 중 하나는 사진작가 김완모 선생의 사진전이다. 김완모 선생이 지난 겨울부터 이번 가을까지 발품을 팔아가며 포도나무 껍질 벗기듯 포도밭을 누드로 벗겨 놓았다. 내 애인 포도밭의 겉과 속을 그가 속 시원하게 다 보여줄 것이다.

포도밭에서 춤을 만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황할 것인가 아니면 수줍게 나무 뒤로 숨을 것인가. 현대무용가 정진이씨의 품격 높은 춤을 풀벌레와 새가 날아다니는 포도밭에서 만나게 된다.

불량한 소음에 우리 귀는 얼마나 많이 시달렸는가. 포도밭에서 듣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선율도 감상할 수 있다. 이것 말고 보여줄 게 더 있지만 나머지는 포도밭에 와서 보시라고 권해 드린다.

아차! 놓치고 갈 뻔했네.혹시 포도막걸리 마셔본 사람이 있을까? 포도화채는? 포도경단이나 백포도주 돼지고기 찜은? 대부분 이런 음식들은 쉽게 맛보기 힘들 텐데,팔불출 같지만 아내와 함께 만들어서 그날 잔치 손님들께 대접할 생각이다.

포도밭을 거닐며 나무에 인사하기,이름 지어주기,풀들에 말 걸기 등 다채로운 체험은 9월6일 오후 2시에 진행된다,지금까지와는 다른 이 대규모 행사를 생각할 때,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있다. 이 많은 행사를 진행하려면 돈이 꽤 들어갈 텐데 경비는 어떻게 충당했는가? 궁금할 거 없다. 내가 꼬박 삼십사년 동안 농사짓고 사는 남양주시에서 절반을 넘게 받았다.

2011년에는 세계유기농대회가 남양주에서 개최된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려 꽤 괜찮은 축제로 만들 계획을 나는 가지고 있다. 유기농과 류기봉은 형제 아닌가. 형제가 잘 협력하여 세계유기농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중요한 게 또 있다. 이번 만큼은 포도밭에서 큰소리를 내면 안 될 것이다. 발소리도 조심조심 줄이고 목소리도 조곤조곤 낮추고….갑자기 사람들이 많아지면 포도나무가 놀라고 벌레와 새들도 도망갈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