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양쪽의 울창한 가로수는 서로 맞닿아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차도와 인도사이 조각 목재를 두텁게 깐 말(馬)전용길도 인상적이었다. 암스테르담 교외 최고급 부촌의 아늑한 그곳에 주 네덜란드 한국대사의 관저가 있었다. 대지 약 1만평(3만3000㎡)에 오래된 건물은 보호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저택이다. 카이로의 이집트대사 관저는 백악관을 닮았다. 중동건설붐 때 우리 기업이 지은 것이라 했다. 푸른 정원수가 돋보였고, 영화에서나 봤던 나선형 계단이 1층의 현관과 위층을 양갈래로 잇는 실내구조였다. 대사는 기품 있게 그 계단으로 내려와 본국서 온 기자를 환대했다. 런던시내 최고급 주택지역의 빅토리아풍 저택인 주영대사 관저는 천장 높은 방마다 잘 배치된 고가구와 낯 익은 듯한 그림들이 품격을 더했다. 근래 집값만 300억원쯤 됐다고 들린다. 전세였다는 점이 유감이었지만 이탈리아대사 관저도 로마시내의 멋진 야경이 한눈에 펼쳐지는 드넓은 테라스가 딸린 대형 맨션이었다. 한결같이 폼났다.

기자가 방문한 몇몇 한국대사의 관저 모습이다. 10년도 더 전에 방문한 곳도 있고 7,8년전 일도 있으니 지금은 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외교란 게 잘 변하지 않으니까.

내심 "이래서 외교관,외교관 하는군"하는 일말의 놀라움과 "이게 모두 국민세금인데…"라는 일종의 경계심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대사관저를 방문할 때는 한국의 국력에 자부심까지 느낄 수 있었다. 특정국가로 파견된 한 나라의 대표가 바로 대사 아닌가. 그런 대사가 국익을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면서 생활도 하는 곳이 관저다.

말이 간단해 국익이지,안보와 선린우호,통상과 산업,문화예술과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개방된 이 지구촌 시대에 국가의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는 분야는 없다. 국경은 갈수록 낮아지고,그만큼 이해충돌 요인은 늘어난다. 놀러 가든 살러 가든 해외로 나가는 국민은 또 얼마나 많은가. 협상은 협상대로,이들의 안전은 안전대로 365일 신경써야 하는 게 대사이고 그 아래 외교관들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네 일상풍경과는 달라도 한참 달라보이는 대사관저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다만 이성적으로 보고 편견도 없애려 이렇게 생각해본다. '막중한 일 하는데 단지 겉만 보고 시비한다면 소인배 아닌가. 더구나 한국도 이젠 세계 10위권 경제를 목전에 둔 강소국이다. 1970년대 이전, 값쌀 때 구입했다면 차익도 많이 난-물론 장부상 이익이지만- 우리의 국가자산 아닌가. 간혹 값비싼 포도주를 과도하게 구입해 예산낭비했다는 식의 감사원 지적도 없지 않지만 설마 불요불급한 데야 돈 쓰겠나. 타국 외교관들에게 우리 수준도 좀 보여줘야지. 실무급 고생은 또 어떻고…'

독도문제, 금강산문제로 국민 모두가 돈으로는 계산할 수도 없을 만큼 스트레스를 받는 요즘이다. '망신외교' 논란으로 절망감도 크다. 군함과 전투기 없이도 독도를 지키는 게 외교다. 국가경제가 어렵지만, 국토가 관련된 일이라면 비용이 문제이랴.대사관과 관저를 더 거창하게 짓고 외교부 조직을 키운 들 어떤가. 단,주어진 소임을 정말 제대로 해 낸다면,그래서 국민의 좌절감을 덜어주고 '외교 스트레스'를 예방할 수만 있다면.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