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중연 < 한국정보보호진흥원장 jyhwang@kisa.or.kr >

얼마 전 한 모임에서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미국의 한 주간지를 보다가 자신도 한번 따라해 보고 싶은 기사를 읽었다는 것이다.뭐냐고 했더니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내 명의의 휴대폰과 신용카드,유선 전화,이메일을 사용하지 않기,로그인이 필요 없는 인터넷 사이트만 접속하기,감시 카메라가 많은 은행 등의 외출은 삼가고 외출시 모자와 선글라스 착용하기' 등의 일상 규칙이란다.이 같은 준칙은 미국의 한 사생활 보호 변호사가 주간지에 밝힌 내용이란다."왜 그런 규칙을 따르고 싶어하느냐"고 묻자 "빅 브러더(감시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란다.

물론 그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던 모양이다.그런 준칙을 지킨다고 자신의 데이터 흔적이 남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교통카드를 사용해도 정보는 남는다.또 지하철 역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누군가가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블로그에 올릴지도 모를 일이다.현실에서 더 이상 완벽한 익명과 흔적 감추기는 불가능하다.종종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이나 도로를 지날 때 CCTV를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행동이 갑자기 부자연스러워지거나 머쓱해지기도 한다.사실 누군가 나를 별 이유 없이 지켜보고 감시하고 흔적이 남게 한다는 것은 찜찜한 일이다.

최근 CCTV 설치와 관련,'사회안전 장치'란 의견과 '감시 장치'란 의견이 분분하다.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술을 사용할 때 인간이 디지털 문명의 종속물이 아니라 주인이란 것에 큰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기술은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 들어가면 돌아올 수 없는 땅',낙타마저 연일 죽어가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탐험한 브루노 바우만은 드넓은 바다의 물결이 멈춰 있는 것 같은 모래 사막을 지나면서 "내 뒤로 나의 외로운 '흔적'은 끝없는 모래 속 어딘가로 사라지고 있었다"고 했다.그는 죽음의 사막 속에서 자신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했고 자신의 흔적이 남기를 바랐다.

살다 보면 우리는 첫사랑의 흔적,정말 감추고 싶은 흔적 등 수많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아니 우리 삶의 궤적이 흔적의 모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추억과 우리의 흔적은 나와 우리만의 것으로 남겨져야 한다.CCTV든 어떤 것이든 내 흔적이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때는 엄격히 다뤄져야 한다.내 흔적은 내가 지치고 힘들 때마다 꺼내 보면서 삶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기약하려는 소중한 삶의 편린(片鱗)들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