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찬탈과 혁명은 '민본주의' 정치 여부로 판단
[최양진 선생님의 철학으로 만나는 역사] 1. 맹자사상으로 풀어 본 조선건국의 정당성

조선 건국의 정당화를 논하기에 앞서 고려 왕조 몰락의 결정적 계기가 된 위화도 회군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왕(禑王) 즉위 뒤 고려는 원(元)과 가까운 외교정책을 펴 명(明)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388년 3월 명나라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관하지역을 영유하기 위해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고하자 고려의 최영(崔瑩) 등은 명나라의 대(對)고려 전진기지인 요동정벌론을 제기했다.

이에 고려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다.

처음부터 요동정벌론에 반대한 이성계는 정벌군이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 남쪽에서 왜구가 침벌할 염려가 있으며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다는 4불가론을 들어 요동정벌이 불가능하다는 글을 올려 우왕에게 회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있던 최영과 우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이성계는 5월20일 회군을 결행,군대를 국내로 돌이켰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정벌군과 싸우려 하였으나 곧 이성계에게 붙잡혀 고봉현(高峰縣 ; 高陽)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고,우왕도 강화도로 쫓겨났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는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한손에 잡아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 이성계, 왕위찬탈인가 혁명인가

조선 건국의 결정적 계기가 된 위화도 회군을 놓고 역사학자들은 아직까지도 그 정당성을 둘러싼 찬반 대립이 팽팽하다.

왕위찬탈인가 아니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혁명인가.

밖으로 눈을 돌려 이와 유사하게 고대 중국에서 벌어졌던 은주(殷周)혁명에 대한 맹자의 생각을 살펴 보자.

'인(仁)을 해친 자를 도적이라고 하고, 의(義)를 해친 자를 깡패라고 한다.

도적·깡패는 하나의 필부(匹夫)일 뿐이니,필부인 주(紂)를 죽였단 말은 들어봤어도 임금을 죽였단 말은 못 들어봤다.'

맹자의 '양혜왕편(梁惠王篇)'에 나오는 이 구절은 폭군으로 주색에 빠져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은(殷)나라의 주(紂)를 정벌한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역성혁명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즉 맹자는 왕위 찬탈과 혁명의 차이에 대해 하늘이 정해주면 혁명이고,그렇지 않으면 찬탈이라고 했으며 하늘(天命)의 기준은 민심(民心)이라고 설명했다.

맹자는 백성을 통치의 근본으로 삼는 민본(民本)주의를 주장한다.

'민귀군경(民貴君輕)'이란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맹자는 백성을 정치의 목적이자 주체로 생각하고 있다.

정치적·경제적 안정은 백성들이 생존하기 위한 기본이고 이를 지키는 것이 임금의 최대 의무라고 보았다.

맹자의 왕도정치 사상이란 바로 이를 말한다.

맹자의 왕도정치에서 인정(仁政)은 위정자가 국가의 근본인 백성의 고충을 돌아보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다.

어진 마음은 민생고(民生苦)를 해결해 주고자 하는 따뜻한 배려와 선정으로 나타난다.

결국 맹자사상으로 보면 찬탈과 혁명의 기준은 민본주의에 기인한 왕도정치의 바탕 위에 민심의 지지를 얻어내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 과전법으로 민생고 해결 노력

[최양진 선생님의 철학으로 만나는 역사] 1. 맹자사상으로 풀어 본 조선건국의 정당성

그러면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은 찬탈과 혁명 중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가?

맹자사상에 의하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은 고려 말의 전제개혁을 계승한 토지제도인 과전법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무신의 난(1170년) 이후 고려 토지제도의 근간인 전시과가 붕괴되자 권문세족들의 권력집중으로 토지의 겸병 현상이 발생하는 등 사회 경제적으로 혼란이 왔다.

대농장화가 발생했고 권문세족들의 농민에 대한 수탈은 더욱 가혹해져 토지를 갖지 못하는 농민이 증가했다.

게다가 공납과 부역까지 국가에 바쳐야 하니 민중은 삶 자체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국가에 대한 공납과 부역을 하지 않아도 되는 노비가 되겠다고 여긴 농민들이 권문세족의 농장에 의탁(依託)해 스스로 자유민임을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이러한 혼란기에 이성계를 위시한 신진사대부 세력은 공양왕을 앞세워 사회모순의 척결을 꾸준히 주장해 온 정도전,조준 등 신흥사대부들과 함께 과전법(科田法)을 제정함으로써 사전(私田·개인소유 논밭)의 폐단을 극복하는 동시에 새로운 국가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과전법은 고려말 세금 납부 의무가 없는 불수조(不收租)의 사전을 개혁하여 국가 수조지(收租地)로 환원시키는 한편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을 막론하고 그 수조율(收租率)을 매 1결(結)당 10분의 1조(租)인 30두(斗)의 조로 정하였다.

당시 보통 50%에 달했던 수조율을 대폭 경감하고 나라와 경작자 사이,전호와 전호 사이의 중간착취를 없애 농민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고자 한 것이다.

맹자에 의하면 왕권의 근원는 천명(天命)이고,천명의 기준은 민심(民心)이다.

즉 민심을 얻은 군주만이 왕 노릇을 할 수 있다.

민심을 얻는 일의 핵심은 경제에 있다.

농지를 잃고 도탄에 빠져 유랑하는 백성들에게 과전법은 생업을 안정시킬 수 있는 개혁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조선 건국에 대한 백성들의 묵시적 동의는 군주로서 백성들의 생존권 보장 의무를 다하지 못한 고려 왕조에 대한 질책이자 과전법을 통한 민본주의 실현에 대한 희망의 적극적 표현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맹자사상으로 볼 때 조선 건국은 민심의 지지에 바탕을 둔 천명의 동의라는 측면에서 역성혁명에 대한 정당성과 정통성을 찾을 수 있다.

<용어설명>

▶역성혁명(易姓革命)=왕조에는 각각 세습되는 통치자의 성(姓)이 있다.

따라서 왕조가 바뀌면 통치자의 성도 바뀌므로 역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혁명은 왕조의 교체는 곧 천명(天命)을 혁신하는 행위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상은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무너뜨린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맹자(孟子)에 이르러 혁명시인의 사상으로 정비되었다.

▶왕도정치(王道政治)=유교정치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정치를 가리키는 개념.

패도(覇道)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패도가 힘에 의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가리킨다면 왕도는 덕에 의해 정치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은주혁명(殷周革命)=은(殷)나라 말 마지막 왕 주(紂)는 전형적인 폭군이었다고 한다.

미녀에 빠져 나라일은 돌보지 않고 충신들을 박해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다 주(周) 무왕(武王)의 침입을 받아 망하고 만다.

▶수조권(收租權)=국가가 관리에게 자신의 봉급을 백성들로부터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

서울 한성고 교사 cyjin74@hanmail.net


생각의 가지치기

- 조선은 고려의 정신을 계승한 국가인가, 아니면 새로운 이념을 만든 국가인가

- 조선건국에서 중국의 상황은 어떤 영향을 미쳤나

- 왕도정치와 패도정치를 비교한다면

- 당시 요동정벌을 강행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 마키아벨리즘시각에서 조선건국을 볼수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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