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남녀 vs 연놈
오승현 (힘수학 논술팀장)


남한과 북한이 함께하는 공식 행사에는 보통 두 명의 사회자가 같이 무대에 선다.

한 사람은 남한 사회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북한 사회자이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이 행사를 소개할 때 각자 다른 방식으로 한다는 점이다.

남한 사회자가 '남북이 하나된 뜻깊은 자리'라고 소개하면,북한 사회자는 '북남이 하나된 뜻깊은 자리'라고 소개한다.

이런 차이는 자기와 관련된 것을 앞에 두고자 하는 심리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자기와 관련된 것을 관련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 먼저 말하는 것이다.

두 단어가 결합하여 쓰일 때 긍정적이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앞에 오고,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뒤에 온다.

선악(善惡),미추(美醜),진위(眞僞),시비(是非),찬반(贊反),강약(强弱),우열(優劣),대소(大小),광협(廣狹),상하(上下),장단(長短), 고저(高低),본말(本末),내외(內外), 승패(勝敗), 상벌(賞罰), 신구(新舊),귀천(貴賤),주종(主從), 금은(金銀),길흉(吉凶),흥망(興亡),성속(聖俗),희비(喜悲),애증(愛憎),높-낮이(낮-높이:×),잘-잘못(잘못-잘:×),행-불행(불행-행:×) 등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들을 앞에 두고,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들을 뒤에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빈부(貧富), 손익(損益), 사활(死活), 화복(禍福) 등에서는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이 앞에 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우리말에서 일반적이지 않고 예외적이다.

우리의 언어 직관에 따르면 긍정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보다 앞서 있다.

여성과 남성이 결합된 합성어의 경우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대개 남성을 앞에 두고 여성을 뒤에 둔다.

이런 예는 우리말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남녀(男女), 부모(父母), 조부모(祖父母), 학부모(學父母), 자녀(子女), 부부(夫婦·남편과 아내), 아들 딸, 형제자매, 선남선녀, 소년소녀, 신랑신부, 장인장모, 신사숙녀 등이 그렇다.

자식이 얼마나 되는지 말할 때도 '1남2녀'라고 말한다.

여남, 모부, 조모부, 학모부, 여자(딸과 아들), 부부(婦夫·아내와 남편)는 어색할뿐더러 우리말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래아 한글'로 여남, 모부, 조모부,학모부,여자,부부(婦夫)를 쳐보면 그 아래 빨간 줄이 그어진다.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딸아들,자매형제,선녀선남,소녀소년,신부신랑,장모장인,숙녀신사,2녀1남 등을 의도적으로 사용한다 해도(의도적으로 사용했을 때) 뜻은 통하겠으나,어색한 느낌이 든다.

여남,모부,조모부,학모부,여자(딸과 아들),부부(아내와 남편)는 애초에 의도적으로 사용할 수조차 없다.

사전에 올라와 있지 않은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을 쓰게 되면 듣는 사람과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물론 부부의 경우는 예외다.

夫婦와 婦夫는 한자 표기로는 엄연히 다르지만 발음이 같기 때문에 의사소통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전 어디에도 婦夫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이 말들은 남성 중심적 사회(사고)가 낳은 결과이지만 동시에 남성 중심적 사회(사고)를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같은 언어 사용은 은연중에 남성이 여성보다 앞선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더 가치 있고 중요하며 긍정적이라는 생각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어 직관에 따르면,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가치 있고 중요하며 긍정적인 것이 앞에 오고 그렇지 않은 것이 뒤에 오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부정적인 상황에서는 으레 여자가 남자보다 앞에 온다는 점이다.

여자와 남자를 함께 낮추어 이르는 말인 '연놈'을 보자.앞에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결합된 말들에서 언제나 남자가 앞에 왔던 것과 달리 이 경우에는 남자가 여자 뒤에 오고 있다.

보통의 경우에는 남녀가 되고 낮추어 부르는 경우에는 연놈이 되는 것이다.

또한,'연놈'에서 '년'과 '놈'은 욕의 수준이 다르다.

'년'에는 욕의 냄새가 가득하지만,'놈'에는 욕의 냄새가 약하거나 거의 없다.

'불효막심한 놈','고놈''친구 놈'에서 보이는 '놈'은 남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남자 아이를 귀엽게 이르는 말,사람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비복(婢僕·계집종과 사내종),에미 애비('에미 애비도 없는 놈'),가시버시(부부를 낮잡아 이르는 말),가시나 머시마,계집 사내 등이 있다.

부모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앞에 오지만 에미 애비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앞에 온다.

가시버시에서 가시는 아내를,버시는 남편을 뜻한다.

이 말은 부부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낮추어 부를 때만 여성이 남성보다 앞에 오는 것이다.

가시나 머시마는 다음과 같은 예에서 확인된다.

"가시나 머시마 눈이 맞은 것만 해도 남사스런 일인데 이거는 골라도 우야믄 그렇기,아 하필이믄 소 잡는 백정놈 자식이란 말고!"(박경리,<청소년 토지> 4부 1권 3장 명희의 사막 '깨끗한 애국자'에서)

'계집 사내'의 경우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사내 계집'도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이버 검색창에서 계집 사내와 사내 계집을 치고 두 단어가 포함된 책들을 찾아보면 계집 사내가 사내 계집보다 두 배 정도 더 많이 검색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 가관인 것은 인간이 아닌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표현에서는 암컷이 수컷보다 앞에 온다는 점이다.

암수나 자웅(雌雄)이 여기에 속한다.

정리하자면,비속어나 천한 신분,동물의 경우에는 여성이 앞에 온다.

물론 처녀 총각이나 엄마 아빠처럼 특별히 부정적이지 않은 경우에 쓰는 말인데도 여성이 남성보다 앞에 오는 경우가 있다.

또한,천한 신분과 관련한 말인데도 남성이 여성보다 앞에 오는 경우도 있다.

비복과 달리 사내종과 계집종을 일컫는 노비(奴婢)는 남성이 여성보다 앞에 온다.

이와는 조금 성격이 다르지만,잡놈 잡년,할멈 할아범 등도 예외적인 경우라 하겠다.

잡놈 잡년,할멈 할아범 등은 낮잡아 부르는 말이지만 반대로 잡년 잡놈,할아범 할멈이 함께 쓰이는 경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잡놈 잡년,할멈 할아범 등에서조차도 남성이 여성보다 반드시 앞에 놓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앞에 놓이는 경우와 뒤에 놓이는 경우가 비슷하게 쓰이고 있다.

결국,일반적인 한국인의 언어 직관에 따르면 남성이 거의 앞에 오고 여성이 뒤에 오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부정적이거나 낮잡아 부르는 경우에는 여성이 거의 앞에 오고 남성이 뒤에 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말은 언제나 이중적이다.

그것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인 동시에 현실을 보는 창이다.

말에는 그 사회의 현실이 투영되어 있다.

남성 중심의 사회는 남성 중심적인 말들을 만들어낸다.

남성과 남성의 지배를 받는 여성이 남성 중심적인 말들을 만들고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말은 '인간이 부리는 도구'에서 '인간을 부리는 주인'으로 돌변한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말이 규정한 질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용하는 말에 따라 사람의 사고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성을 폄하하고 비하하는 말이 존재하는 언어는 여성을 폄하하고 비하하는 현실의 반영이다.

그렇지만 그런 말이 존재하므로 여성을 폄하하고 비하하는 사고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말을 바꾼다고 현실이 죄다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은 변화이나마 그 시작을 언어에서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말을 바꾼다고 현실이 한순간 달라지지 않겠지만,말이라도 바꿔야 현실이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

hymenn@naver.com

▶ 글쓴이 소개

오승현 선생님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말과 그 말에 담긴 고정관념을 검토해 보고 말을 통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자는 취지에서 이 글을 보내왔습니다.

오 선생님은 서강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 대치동 소재 힘수학학원 논술팀장을 맡고 있고 이달 중 '행복한 지식 배달부'(북&월드)라는 저서도 출간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