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咸仁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올 한 해 노동과 관련해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이슈 가운데 하나는 '일과 가족의 균형'이었다.

지나치게 교과서적으로 여겨져 딴죽걸기조차 민망한 이 슬로건이 세계노동기구(ILO)를 필두로 해 글로벌 기업의 화두로 등장하기까지는 만만치 않은 여정(旅程)이 있었다.

일과 가족의 균형 문제는 '맞벌이 부부의 규범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워킹 맘'의 비율이 70%에 육박하게 된 현실에 힘입은 바 큼은 물론이다.

그러나 1980년대 말,일하는 엄마들의 이중역할 부담을 완화시켜주기 위한 대안으로 하버드대 경영학과 교수에 의해 '마미 트랙'이 제안됐을 때 여성들 의견은 정확히 반반으로 갈렸다.

여기서 '마미 트랙'이라 함은 출산과 양육을 전담하는 여성 인력의 특수성을 십분 고려해,직업을 갖는 순간부터 임금 수준은 물론 승진 배치 교육에 이르기까지 남자들과 경쟁하지 않는 엄마들만의 트랙을 의미한다.

엄마에게 마미 트랙을 제공해줌으로써 일과 가족의 양립을 위한 선택지를 제공해주자는 것이 요지였다.

'마미 트랙'안(案)이 발표되자마자 절반의 워킹 맘들은 현실적 대안이라며 두 손 들어 환영을 표했고,나머지 절반의 워킹 맘은 '여성=일차적 양육자' 공식을 강화함으로써 그럴 듯한 포장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마미 트랙'은 소리 없이 노동시장에서 사라져 갔고 대신 '가족친화적 정책'이 힘을 얻기 시작하면서,일하는 엄마 못지않게 '일하는 아빠' 또한 일과 삶의 균형 유지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서서히 공감대를 얻어가기 시작했다.

일하는 엄마를 위한 전문가들 조언인 즉,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서는 세 개의 바구니를 준비해 각각의 바구니 속에 엄마에게 주어진 과업을 적절히 할당하라는 것이다.

첫 번째 바구니 속엔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숙제'를 넣을 것.업무용 프레젠테이션은 누군가 대신해 줄 수도 있고 회의는 시간을 미룰 수도 있지만,우리 아이들 인생에 평생 한 번뿐인 순간은 반드시 놓치지 말라는 이야기다.

두 번째 바구니 속엔 '엄마와 아빠가 사이좋게 나눌 수 있는 과제'를 넣을 것.아이 병원에 데리고 가는 일,담임선생님과 면담하기,숙제 봐주기 등은 엄마 아빠가 함께 하는 것이 모두에게 윈윈 전략이라는 이야기다.

세 번째 바구니 속엔 '돈을 투자해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넣을 것.단 이 때 누군가를 고용한다고 해서 엄마 아빠의 고유한 역할과 책임이 줄어드는 건 아님을 명심하란 충고가 이어진다.

일과 가족의 균형이 일하는 엄마에게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론적으로는 일하는 아빠에게도 필수임이 분명하다.

한데 일하는 아빠 입장에선 선뜻 내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회식과 야근이 일상화돼 있는 조직문화에 획기적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 한,일하는 아빠들은 균형을 포기하고 가족을 희생한 채 '일 중심 이데올로기'를 기꺼이 수용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가족이 아수라장 일터처럼 화하고 일터가 가족처럼 안온해지는 현실에서 아빠들 입장에서야 "어떻게 나온 집인데" 하며 귀가 공포증을 정당화할 명분이 널려 있다.

하지만 일하는 아빠들이 잊어선 안 될 것이 있다.

아이들은 아빠를 영원히 기다려주지 않기에,직장 떠난 후 돌아와 본들 그 땐 아무 곳에도 아빠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감 높고 긍정적 사고의 소유자일수록 아빠 역할에 적극 참여하며,아빠 역할에 실질적 투자를 많이 할수록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가 높아짐은 물론,자녀들 또한 아빠와의 적극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지적 발달 및 정서적 성숙도에 있어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는 연구 결과에 귀 솔깃해질 아빠들이 늘어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