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를 살리자'는 얘기는 이제 그만합시다."

최근 만난 정부 고위관료 A씨는 교육 현주소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이렇게 말허리를 끊었다.

"똘똘한 학생들이 공대를 가지 않기 시작한 게 벌써 20년 전이에요.

요즘 성적이 뛰어난 이과생들이 가장 먼저 지원하는 곳이 어딥니까?한의학과입니다.

K대 한의학과 말입니다.

그 다음이 의대지요.

의대도 안되면 치대를 가고,치대나 약대도 어려우면 의학전문대학원 진학이 가능한 생물학과 같은 곳을 갑니다.

…공대요?우수 인력이 몰리던 시대는 이미 끝난 지 오래입니다."

그의 결론은 간단했다.

정부가 경쟁력이 없는 공과대학을 살리는 데 그 많은 예산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수 인력들이 공대를 20년간 외면했다면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는 것.그의 주장은 "차라리 지금 같으면 정부가 제조업을 버리고 우수 인력이 몰린 의학계를 적극 지원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데까지 이어지더니 "침이나 뜸으로 암을 고칠 수 있는 시대가 머지 않아 한국에서 열릴 것"이라는 자조로 마무리됐다.

한국을 먹여살리고 있는 반도체 자동차 조선산업에 인재들이 20년째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것은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의 경쟁력도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이들 간판기업의 경쟁력을 20여년 전 입사한 간부들이 유지하고 있는 셈이니,그들의 은퇴 이후가 두려울 뿐이다.

청소년들이 공대를 기피하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한다한들 급여 수준이 의사와는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사업장이 지방에 위치해 불편한 점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고, 언제 그만둬야 할지 몰라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게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보다 큰 원인은 교육시스템과 왜곡된 직업관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초ㆍ중ㆍ고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미래를 심각하게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자신의 꿈이 무엇이고,그 꿈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설명하는 학생들을 본 적이 있는가.

아이들은 그저 공대를 나온 직장인이 되기보다는 의사가 되길 바라는 학부모와 아이들의 미래를 성적 순으로 끊는 교사들의 틈바구니에서 성적에 맞는 '맞춤형 꿈'을 꿀 뿐이다.

학부모의 허욕과 교사들의 기계적 교육태도에 아이들의 적성은 이미 관심 밖이다.

인문계 학생들이라고 어디 다르겠는가.

교육학과나 교육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고,그게 여의치 않다면 일반공무원 시험에 목을 매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초ㆍ중ㆍ고등학생 모두가 교사를 장래 희망직업 1위로 꼽았다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최근 설문조사 결과가 어디 괜한 것이겠는가.

외환위기 이후 가장들이 순식간에 직장을 쫓겨나는 장면을 지켜본 탓인지,잘하건 못하건 평가조차 받지 않는 교사들과 일을 열심히 하건 하지 않건 완벽한 정년이 보장돼 있는 공무원만이 우리 아이들의 꿈이다.

성적 순으로 꿈을 꾸는 청소년들이 예비 철밥통으로 커가고 있는 사회….우리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김정호 경제부장 j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