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고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선후배 1000명이 나의 전재산

[한국의 CEO-나의 성공 나의 삶] 임성주 C&그룹 부회장
줄 때보다 받을 때 기분이 더 좋은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일텐데,그는 주는 게 더 익숙하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 CEO(최고경영자)가 된 10여년 전부터 급여의 10%를 봉사단체에 기부하고 있으며,'보고 싶다'는 후배와 지인들의 청을 차마 뿌리치지 못해 밥값과 술값으로만 매달 수백만원의 사비를 턴다고 했다.

하지만 임성주 C&그룹 부회장(63)은 퍼주기만 했던 지난 세월에 대해 "손해를 본 삶은 아니었다"고 단언한다.

아낌없이 베푼 대가로 언제라도 소주잔을 기울이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1000여명의 '마음'을 얻었다는 이유에서다.

넉넉한 마음과 편안한 말투 덕분에 '재계의 마당발'이란 별명을 갖게 된 임 부회장은 1944년 전라남도 목포의 유복한 가정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루 세 끼만 먹어도 부잣집이라고 하던 한국전쟁 직후에도 도시락 반찬으로 장조림을 싸올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한국전력 목포지점장이었다.

어린 시절 임 부회장은 '공부 잘하는' 부잣집 아이였다.

친구들의 시샘을 받을 법도 했지만,활달하고 착한 성격 덕분에 '밉상'은 아니었다고 한다.

"한번은 선생님이 저를 부르더니 '네가 반장이니까 학비 못낸 친구들 집에 가서 받아오라'고 시킵디다.

가보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집들이에요.

전쟁 탓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와 사는데….

어린 마음에도 너무 가슴이 아파서 어머니에게 사정해 친구들에게 학비를 건네주기도 했어요."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자라며 그가 키운 꿈은 해군 장교였다.

단순히 바다가 좋고 배가 좋아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미끄러지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임 부회장이 차선으로 택한 곳은 전남대 화학과.

여느 대학생처럼 젊음을 만끽하던 어느 날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린시절 꿈이 다시 떠올랐다.

"아주 어렸을 때 전남 담양에 있는 외갓집에 갔던 기억이 났어요.

그 집의 상(上)머슴이 엄청나게 멋져 보이던 기억….머슴 중의 왕이어서 그런지 다른 머슴들과는 격이 달라요.

밥도 좋은 반찬에 따로 먹더군요.

'나중에 머슴살이를 하게 된다면 나도 상머슴이 되겠다'고 생각했었죠.

대학 시절 그 생각이 떠오른 뒤로 '남들보다 빨리 회사에 들어가 초고속 승진을 해보자'고 마음 먹게 됐습니다."

ROTC로 군 복무를 마친 그는 첫 직장으로 애경을 택했다.

애경 창업주인 고(故) 채몽인씨가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였다는 이유에서 말단사원으로 입사했다.

당시 애경은 재계 7위 규모의 큰 기업이었다.

자연스레 인재들이 몰렸고,입사 후에도 경쟁이 치열했다.

임 부회장은 영업맨으로 시작했다.

'장돌뱅이'처럼 봇짐을 싸매고 장이 서는 곳을 돌아다니며 비누를 팔았다.

서울 남대문 동대문 을지로를 훑었고,국방부 철도청 조달청을 찾아다니며 특수판매도 했다.

영업 실적은 늘 정상급이었다.

부지런함과 예의바른 인사 덕분이었다는 게 임 부회장의 설명.

"영업맨은 악착같아야 해요.

경쟁자가 거래처를 한두 번 찾을 때 나는 서너 번 간다고 만족해선 안 돼요.

10번,20번 가야 합니다.

저는 설에 고향에 안 가고,거래처에 세배 다니기도 했어요.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싫다는 여자를 몇 년이나 쫓아다닌 끝에 결혼했어요.

요즘 말로 '스토커'였죠."

실제 임 부회장은 사업가나 직장인이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성실함을 꼽는다.

'해보겠다'는 적극성과 '해내겠다'는 집념이 직장인에겐 총명함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임 부회장이 1968년 입사한 이래 아직까지 한 번도 휴가를 가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신혼여행조차 1박2일짜리 부산 여행이 전부였다.

"저는 '1년 365일 영업합니다'란 간판이 붙은 음식점은 무조건 찾아갑니다.

고객을 위해,또 자신의 성공을 위해 휴일을 반납하는 거잖아요.

장사를 하겠다는 사람이 주말에 쉰다는 게 말이 됩니까.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성실해야 합니다.

저는 쉬엄쉬엄 일하려는 사람을 무지하게 싫어합니다."

평생 일만 하다보니 별다른 취미조차 갖지 못했다는 임 부회장은 스트레스도 일로 풀어버린다고 했다.

"일에 집중하다 보면 아예 일에 빠져버려요.

스트레스 받을 시간이 없는 거죠.오히려 멍하니 있으면 어깨도 아프고,머리도 쑤셔요.

그러다 어려운 일이 주어지면 다시 머리가 맑아지고 반짝반짝해집니다."

성실함에 대한 보상은 '빠른 승진'이었다.

그는 39세에 임원이 됐고 50대 초반에 사장이 됐다.

2005년에는 애경그룹 부회장에 올랐지만,'상머슴' 자격으로 37년을 모시던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이 건강 악화로 일선에서 물러나자 함께 퇴진했다.

이후 종친인 임병석 C&그룹 회장의 구애를 받고,C&그룹 총괄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스로를 '상머슴'으로 낮춰부르는 임 부회장은 자기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 제 장인이 충청도에서 제일 큰 토건업체를 운영했어요.

결혼하니까 장인이 '같이 일하자'고 제의하더군요.

'지금 내 일이 좋고 잘 할 자신이 있다'고 거절했죠.그랬더니 오히려 똑똑하고 생각이 바르다며 좋아하시데요.

한창 영업으로 주가를 올릴 때도 독립해 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뿌리쳤어요.

저는 지금도 신입사원 교육 때 '본가나 처가에 손벌릴 사람은 당장 나가라'고 해요.

이를 악물고 자기 힘으로 살아갈 생각 안 하면 봉급쟁이 생활 제대로 못합니다."

오랜 기업인 생활과 넉넉한 마음 씀씀이는 임 부회장에게 많은 지인을 안겨다줬다.

편하게 전화하고,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와 선·후배만 1000명에 달할 정도다.

임 부회장의 '사람 사귀는 법'의 핵심은 역시 성실함이다.

한밤중에도 지인들이 찾으면 달려나간다고.타고난 체력과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경조사엔 절대 안 빠진다.

직접 참석할 상황이 안 되면 아내나 비서라도 보낸다고 한다.

"좋은 인간관계는 업무 능력을 높이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한 다리만 건너면 누구든 알 수 있는 게 한국 사회잖아요.

일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데 지인들이 도움을 줄 때가 많습니다.

돌이켜 보면 40년 직장생활에서 남은 제일 큰 자산이 바로 '사람'이에요.

이 친구들 때문에 저는 항상 '살맛'이 나요.

이민은 절대 안 갈 거예요"

오상헌 한국경제신문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