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능력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22) 오해의 기원
그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30명의 학생들에게 아래 그림을 보여주면 20여명의 학생들이 링컨이라고 답한다. 나머지 학생도 링컨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면 어려움 없이 알아본다. 그래도 끝까지 링컨이 아니라고 우기는 학생들도 있다. 우기는 학생이 맞다.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다. 링컨을 알아보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학생들이 어디선가 봤다고 기억하는 링컨의 사진은 사실 이 그림과 비슷하지 않다. 수학적으로 따지면 관계가 별로 없다. 수학적으로 별 관계가 없다는 말은 링컨의 사진을 입력해 둔 컴퓨터가 이 거친 흑과 백의 덩어리를 그 사진과 유사한 얼굴이라고 판단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 뇌가 컴퓨터보다 잘하는 일

만약 인간이 컴퓨터 수준의 지각능력을 갖고 있다면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다. 우선 운동장 끝에 서있는 친구를 알아 볼 수 없다. 운동장 끝에 있는 친구의 얼굴이 수정체를 통과해 나의 망막에 맺힐 때 이 그림보다 품질이 좋다고 하기 어렵다. 그래도 우리 뇌는 몇 개 안되는 데이터를 짜 맞춰 친구의 얼굴을 바로 알아본다. 컴퓨터처럼 버버벅 소리를 내며 계산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친구의 얼굴을 알아보기 위해 뇌가 동원됐다는 사실도 자각하기 힘들 지경이다.

전자제품의 디자인은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 특히 휴대폰은 종류가 많아 대개 처음 보는 디자인이다. 그래도 처음 보는 것이 분명한 휴대폰을 놓고 '이게 뭐야'라고 묻는 경우는 드물다. 전화하는 모습을 보지 못해도 휴대폰인지 알기 때문이다. 컴퓨터라면 이 세상 모든 휴대폰을 입력해 놓고 문제의 휴대폰과 일일이 대응시켜 봐야 하기 때문에 신형 휴대폰에 대응하는 데이터가 없으면 휴대폰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 휴대폰의 공통점에서 추출한 모형을 기준으로 찾기 시작 할 수도 있겠지만 파격적인 디자인을 만나면 속수무책이다. 디카를 닮았거나 MP3를 닮았어도 휴대폰은 휴대폰이라고 쉽게 단정지어 버리는 인간의 뇌와는 게임이 되지 않는다.

◆지각은 곧 해석이다

사람은 온통 처음 보는 사물들 속에서 일상을 영위해야 한다. 익숙한 것에 둘러싸여 따분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투덜대는 사람의 뇌조차도 새로운 사물을 해석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해내고 있다. 처음 보는 커피 잔,처음 보는 의자,처음 보는 볼펜,처음 보는 버스,처음 보는 가로수의 잎사귀,처음 보는 선생님의 넥타이,처음 보는 친구의 여드름,그리고 처음 보는 밥,김치,깍두기까지. 차라리 어제도 봤던 그대로의 사물을 오늘도 그 모습 그대로 보는 경우가 극히 예외적이라 생각하는 편이 낫겠다. 그래도 낯선 사물의 홍수 속에서 혼란을 느끼지 않는 것은 뇌가 알아서 정리해주기 때문이다. 뇌의 도움을 받아 의자는 아무리 모양이 특이하고 낯설어도 의자로 지각할 수 있고 여드름이 났다고 친구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 일은 없다. 이렇게 사소한(?) 정보는 원천봉쇄해주기 때문이다. 뇌가 하는 일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이 정리를 눈에서 한다고 느낀다. 지각과 동시에 해석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각은 곧 해석이다.'

◆조상(祖上)의 조건

사냥을 나갔다가 홀로 낙오된 원시인을 상상해보자. 주변의 모든 사물은 위협적이다.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이때 가까운 풀숲에서 맑은 방울소리가 난다. '아 맑은 소리가 나는구나!' 일단 이렇게 지각하는 것이 사실적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적이며 냉정한 원시인이라면 자식을 낳을 때까지 살기 어려웠을 테니 우리의 조상은 되기 힘들었을 터. 우리의 조상들은 정체불명의 맑은 소리 앞에서 무조건 도망가고 보는 소심한 족속들이었을 가능성이 반대의 경우보다 크다.

조상의 소심함을 비웃고 싶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 어린 시절 놀이공원 유령의 집에서 자신이 했던 모든 일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말이다. 어두침침한 전망(前望)에 흩날리는 희뿌연 천을 보고 '어 희뿌연 천이 어디서 나타났지?'라고 담담하게 반응했는가? 아니면 있지도 않은 무덤가의 소복 여인을 상상하며 소리를 질러댔는가? 소리를 질러대거나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면 방울소리에 놀라 도망간 우리 조상님들처럼 당신도 후손들의 조상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춘 셈이다.

◆사실보다는 문제해결

정보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조그만 단서는 상상력을 보충해준다. 방울소리는 방울뱀으로 희뿌연 천은 흰 소복으로 확대해석 된다. 열악한 생존조건과 불확실성 속에서는 이 확대해석이 큰 도움이다. 방울소리가 나면 10번 중에 한 번만 방울뱀이고 나머지 아홉 번은 아닐 수 있다. 소심한 원시인은 아홉 번이나 괜히 놀라고 도망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한 셈이다. 그러나 방울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고 확대해석을 경계하는 원시인이라면 아홉 번은 겁쟁이 동료를 비웃을 수 있겠지만 단 한 번의 치명상을 입고 사라질 위험이 크다. 계산해 보면 이득이 되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소심함이다.

생물은 자신의 생존에 이롭거나 해로운 것들 속에 둘러싸여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뇌는 사물들을 분류하고 해석하는데 탁월하다. 위해(危害)가 되는지 여부를 바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을 지각과 동시에 사물에 부여한다. 예민한 상태에서 이 속도는 훨씬 빠르고 과감하다. 마치 하나의 이야기를 미리 갖고 있다가 외부의 대상에게 뒤집어씌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입 주위에 피를 흘리고 있는 소복 여인이라는 머릿속의 이미지를 희뿌연 천을 만나는 즉시 대상에 부여했다. 그래서 지각작용은 외계의 대상이나 사건이 주는 불확실한 정보를 이용해 하나의 묘사 즉,이야기를 구성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Irvin Rock 'The Logic of Perception')

인간의 뇌는 사실을 사실대로 복사하는 사진기나 복사기가 아니다. 사실보다는 문제 해결이 먼저다. 바로 판단을 내려 자신의 주인으로 하여금 위험이나 곤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불확실한 자극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거나 확대 해석한다. 과감하게 생략하거나 증폭하고 때로는 거칠게 왜곡한다.(황현택,'열린시대 닫힌 커뮤니케이션')

◆직관의 대가

방울뱀을 즉시 피하는데 도움이 되는 쪽으로 발달한 지각 때문에 잃어버린 것은 없을까? 사물을 분류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보거나 사물자체를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게 되었다. 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사건은 지각 자체를 하지 못하기도 한다.

운동장 끝에 있는 친구를 알아보는데 유용한 능력 때문에 아주 가끔 엉뚱한 학생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여드름으로 인해 명백하게 변질한 친구의 얼굴도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능력 덕분에 엄마 헤어스타일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해 무심하다고 핀잔을 듣기도 한다.

문제는 보다 심각할 수 도 있다. 자기 나름의 마음의 이론이 있으면 남의 말을 곧이 대로 듣지 못한다. 오해에 기초해 이미 판단을 내린 다음에는 눈앞에 놓고도 사실을 보지 못한다. 논술에서도 매우 심각하다. 특히 이미 알고 있는 제시문이 나왔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제시문은 논제가 요구하는 문맥에서 읽어야 한다. 제시문의 역사적 배경이나 학문적 유파와 같은 배경지식은 부차적이다. 제시문을 통해 학생이 읽어 내리라 기대하는 요구사항은 논제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익숙한 제시문을 자신이 알고 있는 구조에서 떨어뜨려 놓고 읽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제시문이 쉬울수록 논제에서 이탈하는 학생이 더 많다는 대학의 불평은 일리가 있다. 학생들은 익숙한 제시문을 익숙한 방식으로만 읽으려고 고집을 피운다. 이런 학생은 결국 읽고도 읽지 않은 것과 같다.

◆논술시험이 코앞이라면

직관은 놀라운 능력임이 분명하지만 대다수 사람에게 거저 주어진 재능이다. 직관을 키우는 일에는 의식적인 훈련이 필요 없다. 오히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냉정한 태도야 말로 의식적인 훈련을 통해서만 키울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다. 의미나 판단을 배제하고 일단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본능을 거스른다. 그렇지만 선입견과 통념을 버리고 제시문을 문제 속에서 읽어내는 능력은 논술에서는 결정적이다. 특히 논술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수험생이라면 배경지식을 좇는 시간에 직관을 버리는 훈련을 하는 편이 낫다. 문제만 투명하게 읽어낼 수 있어도 상당히 유리하다. 방울뱀을 피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직관이지만 논술에서는 억제해야 하는 본능이다. 보자마자 결론으로 치달을 수 있도록 해주는 그 속도가 논술이 그토록 요구하는 성찰을 가로막는 첫 번째 용의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