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택수 시인 >

늘 같은 풍경이란 없다.

영화 '스모크'에 나오는 사진작가의 말처럼,사시사철 하나의 거리만을 풍경으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그 거리 풍경은 매번 새롭게 펼쳐지게 마련이다.

길가에 피고 지는 한 송이 꽃과 구름 그림자와 나무 그늘의 농도 변화에 따라 풍경도 미묘하게 변화한다.

풍경은 이미 굳어진 정물이 아니라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에 따라 혹은 새로운 시선의 탄생에 따라 다채로운 빛깔로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곧잘 한 평의 뜨락을 여행하는 데만도 하루종일이 모자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계절마다,아니 그보다 더 작은 단위의 월별로,주별로 바뀌는 주변의 풍광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평생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 하루 베란다에 내다놓은 군자란과 호야에 일어났던 일들을 낱낱이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곤 한다.

'낯선 곳에 가서 살고 싶다.' 나는 흔히들 하는 그런 말을 무척 애석해하는 편이다.

아무리 멀리 간다고 해도 자신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아무리 낯선 이역(異域)을 찾아간다 하더라도 자신이 새로워지지 않는 한 그는 그 이역을 자신의 몸처럼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나는 '낯선 곳'이 지닌 어떤 유토피아적 함의(含意) 역시 믿지 않는다.

지금 이곳의 장소성을 부정하는 유-토피아는 살아 있는 존재의 근거를 뿌리째 거부하고 억압하는 면이 있다.

그리하여 나는 감히 말한다.

'나는 낯익은 곳을 낯선 곳으로 만들며 살고 싶다'고. '내가 발 딛고 선 대지의 익숙함 속에서 낯섦을 발견하고 싶다'고.'이미 보아서 아무런 감흥 없이 심드렁해진 것들 속의 무수한 신대륙과 미개척지를 향해 항해를 떠나고 싶다'고.

그래서 나는 살아 있는 대지를 포획하듯 지도 위에 함부로 그어 내린 경계선과 도시관광책자 따위를 애써 외면하는 버릇이 있다.

'도시계획'이라는 씩씩한 말이 지닌 광포한 직선들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주름들,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은밀히 편애(偏愛)한다.

직행을 타고 정해진 코스만을 따라가는 집단적 소비형의 여행보단,비록 더딜망정 완행을 타고 호젓이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찬찬히 곱씹어보는 여행을 차라리 선호하는 편이다.

풍경은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어야 하고,명소와 비경 역시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추억과 사랑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하잘 것 없는 풍경이라도 그 땅의 이름을 불러주고,그 땅의 이름으로 노래를 하고,그 땅의 구체적 실감을 몸으로 살아내게 되면 그 장소는 모든 곳에서 환하게 꽃피어 나는 것이 아닐까.

"음악은 쓸모없는 공간에 항상 새로이 자신의 신전(神殿)을 짓는다. 가장 많이 흔들리는 돌들로." 릴케의 '올페에게 바치는 소네트'에 나오는 한 구절처럼 나는 '가장 많이 흔들리는 돌'이 되어 내 땅이 지닌 성스러움을 찾아가고 싶다.

'가장 많이 흔들리는 돌'이란 늘 새롭게 자신을 갱신하는 존재,모든 사물을 대문 밖에 첫발을 내딛는 아이의 경이와 설렘 같은 것으로 만날 수 있는 존재를 가리킨다.

'가장 많이 흔들리는 돌'이 될 수 있을 때 세상에 '쓸모없는 공간'은 단 한 평도 없다.

모든 땅이 경배해야 할 성서(聖書)고 경전이다.

그러니 여행은 먼곳에 있지 않다.

여행은 먼곳을 향하여 뻗어간 시선을 자기 안으로 거두어 들일 때 비로소 예상치 못한 진경산수를 보여준다.

여행이 공간의 확장을 통한 자기 내면의 성찰에 있는 것이라면,그 역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휴가철이다.

도로소음측정판 위에서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우는 매미 소리도 따갑고,도로 위의 후덥지근한 열기도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고백하자면 이런 때 나 역시 멀리,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곧 가장 먼 여행지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자신이 몸 담고 있는 이 땅이라는 것을 새삼 되새겨보는 일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