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종 골퍼에게도 단수가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1단은 골프장에서 18홀 내내 헤드업을 한 번도 안하는 사람. 2단은 18홀 내내 말 한마디 안하는 사람. 3단은 동반자 세 명이 모두 내기를 하자는데 혼자 끝까지 안하는 사람. 4단은 내기 돈을 다 따서 몽땅 챙겨 가는 사람. 5단은 번개가 치는데 계속 라운딩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독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골프장에서 벼락을 맞고도 살아남은 사람이다.

벼락을 맞고도 살아남아 '국가대표급 독종 CEO(최고경영자)'로 불리는 허영호 LG이노텍 사장을 서울 마포의 한 삼계탕집에서 만났다.

허 사장은 예상외로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2002년 CEO 취임 당시 적자 상태였던 회사를 1년 만에 흑자로 돌려놓은 데 이어 3000억원대에 불과했던 매출을 5년 만에 1조5000억원으로 끌어올려 놓고도,정작 그는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며 겸손해 했다.

하지만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1시까지 대화를 나누면서 번개를 이겨낸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국가대표 독종' CEO, 한경기자들에 속내 털어놓다

#번개 맞은 사나이

-낙뢰사고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언론에 공개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제 나이는 만으로 한 살입니다. 지난해 6월10일 다시 태어났죠. 토요일이었는데 처음 뵙는 손님들과 곤지암 컨트리클럽에서 라운드를 했어요. 날씨가 좋지 않아 전반 9홀만 돌고 끝내기로 했는데 여덟 번째 홀에서 낙뢰를 맞았죠. 공을 찾으러 큰 소나무 근처로 갔다가요. 번개가 칠 때는 나무 근처에 가면 안 된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어요.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왔는데 말이죠."(좌중 웃음)

-충격이 대단했을 텐데요.

기절하셨나요.

"10초 정도 후에 정신을 차렸는데 배꼽 밑으로 감각이 전혀 없더라고요. 병원으로 옮겨진 후에도 정신은 멀쩡해서 제 신상정보를 다 말할 수 있었죠. 그런데 하반신 감각은 영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때는 앉을 수만 있다면 너무 고맙겠다고 생각했고,4시간 만에 엄지발가락 끝에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을 때는 일어설 수만 있다면 더 이상 행복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죠. 그때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런데 1주일도 안돼 출근을 하셨다니 정말 독하신가 봐요.

"사실 회사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스스로에게는 매우 독한 편입니다. 한때 불면증에 시달린 적이 있는데 어느 날 정신적 스트레스와 육체적 스트레스 사이의 균형이 깨져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이기는 어렵잖아요. 그래서 다음 날 새벽부터 걷고 뛰면서 육체적 스트레스의 강도를 높였죠. 효과가 있더라고요."


#연탄장수 될 뻔하다

-젊었을 때도 그렇게 독하셨나요.

"어느 분이 '월화수목금금금'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죠. 사원 시절 제가 딱 그랬어요. 당시에는 토요일 오전까지 정상 근무였는데 토요일 오후부터는 연장 근무,저녁은 철야,일요일에는 특근,그리고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로 이어지죠. 한 달에 한두 번 쉬었을 것입니다."

-사모님께서 싫어하셨겠네요.

"신혼생활을 구미에서 시작했는데 저는 매일 통금시간 직전에 들어가기 일쑤였죠. 하루는 아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자기랑 같이 연탄배달을 하자고 하더군요. 저는 앞에서 리어카를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고 그러면서 같이 일을 하자는 거였죠. 황당해서 대꾸도 안했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미안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평생 아이들 학교 정문에도 가본 적 없고,하다 못해 동사무소 가는 일까지 아내에게 맡겼으니까요."

-평생을 TV와 관련된 일을 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대학 시절에 '여로'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어요. 방학 때 고향인 제주도에 내려가면 동네 사람들이 저녁마다 이 드라마를 보려고 마을에 한 대 있는 14인치짜리 흑백 TV 앞에 모여 있곤 했죠. 그때 집집마다 TV를 보급하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겠다 생각했고,그래서 금성사에 입사했어요."


#차려진 밥상보다는 밥상을 차리는 게 좋다

-젊은 나이에 공장장이 되셨죠.윗분들의 신뢰가 두터웠나 봐요.

"LG전자 구미 공장장이 된 게 1992년이니까 만으로 딱 마흔이던 해였어요. 당시는 부품 국산화가 최대 이슈였는데 자체 개발한 부품 하나에 품질 사고가 생겨서 공장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죠. 근로자들 중에 저보다 10년 이상 선배들도 많았는데 그런 걸 극복하면서 인간관계를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그 이후부터는 어려움에 처한 조직만 계속 맡아온 것 같네요."

-해결사 역할을 맡으셨군요.

"해결사라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즐거웠던 것 같아요. '일이 있으면 간다'는 게 제 신조였죠. 차려진 밥상에서 먹기만 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밥상을 차리는 게 체질에 맞다고 할까요.

저는 그게 감사했어요. 능력이 있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 비하면 행운아 아닙니까."

-LG전자 TV사업부장을 하다 LG마이크론으로 발령받았을 때는 좀 섭섭하셨을 것 같아요. 또 마이크론 대표이사를 하다 LG이노텍의 부품 사업본부장을 맡았을 때도요.

"조금 섭섭하긴 했죠. 하지만 저는 원래 이것저것 따지는 성격이 아니에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죠.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 좋은데 생각이 깊지 못한 게 아쉬워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하려고 하지 않죠. 하지만 우리가 부모님을 선택할 수 없듯이,주어진 환경을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때 중심을 잡고 길게 보는 자세가 필요하죠."


#CEO는 '해보자'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어려움에 처한 조직을 살려내는 비결이 뭔가요.

"CEO로서 구성원들이 처한 상황을 공유하고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 뿐이죠."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죠.

"브라운관용 섀도마스크를 만드는 LG마이크론 대표이사로 갔을 때는 회사가 잘못된 투자를 해서 재무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한 컨설팅 회사에 의뢰해서 나온 진단 결과를 조직원들에게 알려줬죠. 그리고 '돈을 들여서 저사람들한테 컨설팅을 받겠느냐,아니면 우리 스스로 한번 해보겠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모두들 '스스로 해보자'고 대답하더군요. 임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열심히 일하니 금방 까먹었던 돈을 메울 수 있었죠. 연말에는 이익까지 내서 코스닥에 상장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LG이노텍으로 가셨죠.

"마이크론이 살 만해지니까 이번에는 '이노텍 부품사업이 어렵다'며 발령을 내더군요. 저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받아들였어요. '내가 필요하니 나를 보내겠지'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노텍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 심각하더군요. 무엇보다 만성 적자로 직원들이 모두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던 게 가장 문제였죠. 그래서 직원들을 하나씩 붙잡고 물어봤어요. 우리가 헤매는 이유가 뭐냐. 첫 번째로 많이 나온 대답이 경영층이 너무 자주 바뀐다는 거였고,둘째는 교육을 안한다,세 번째는 투자를 안한다,뭐 이런 내용이 제일 많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직원들을 모두 모아 놓고 약속을 했어요. '사장이 바뀌어도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회사를 만들어보자',교육과 투자는 내가 책임지고 제대로 하겠다고요.

조그마한 것부터 성공 체험을 하게 했어요. 그랬더니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더군요. 항상 어깨가 축 처져 있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죠."

-조직의 분위기나 직원들과의 소통 같은 소프트한 경영을 중시하시는군요.

"LG이노텍 광주 공장에 처음 갔을 때에요. 광주에 처음 내려가서 5·18 묘역부터 찾았죠. 내가 무슨 점령군이 아니라 공장 사람들과 정서를 같이하는 동료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죠. 그 덕분에 첫 방문의 성과는 매우 좋았고,결코 쉽지 않은 변화를 잘 이끌어 낼 수 있었죠."

-그런 노력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매출을 폭발적으로 신장시킬 수 있었던 비결인가요.(LG이노텍은 매년 30~40%씩 매출을 신장시키고 있다.)

"그렇습니다.무엇보다 자발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죠.'우리 스스로를 이기자'는 구호를 내걸고 개인별,부서별로 목표를 정해 달성해 가는 재미를 느끼게 했죠. 그렇게 생긴 동력을 꾸준히 이어가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제품이나 사람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인데 2~3년 후에 우리 스스로도 놀랄 만한 성과가 나타나더군요. 특히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조직 문화를 독려했더니 이제는 신제품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이 제법 커졌어요."

#직장 생활의 지혜

-직장 생활하시면서 모시기 힘든 선배는 없었나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없어요. 얼마 전 한경의 'CEO 세상 사는 이야기' 인터뷰에서 윌리엄 오벌린 보잉코리아 사장이 '훌륭한 상사가 되려면 훌륭한 부하가 돼라'고 말했더군요. 저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건 조금 다른 얘기이지만 부서장이 바뀌면 대부분은 전임자의 모든 것을 부정해요. '그동안의 관행은 모두 잘못됐고 이제 내 방식대로 해라' 이런 식이죠.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임자가 닦아 놓은 기반 위에서 더 잘할 수 있는 것을 해야 발전이 있죠. 그런 게 참 아쉬울 때가 많았어요."

-사회 초년병들한테 한 말씀 해 주시죠.

"신입 사원들이 들어오면 늘 두 시간 정도 시간을 내 얘기를 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북받쳐 오면서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들에게 어떤 꿈을 줄 수 있나,미안한 마음이 앞서고. 하지만 어떡하겠어요. 험난한 길을 가야죠. 한 가지 분명하게 얘기하는 건 '대기업이니까 안정적일 것이라고 생각해 우리 회사를 선택했다면 지금이라도 바꾸라'는 겁니다. 열정과 도전 정신이 없으면 조직에서 성공할 수 없으니까요."

-좌우명은 무엇이죠.

"'현실에 충실한 것이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입니다. 작년에 벼락을 맞고 그 잔상이 지워지지 않아 4박5일 동안 템플 스테이를 한 적이 있어요. 그 때 한 노스님께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불만족,후회,원한 같은 것들이 떠오르고 미래를 생각하면 불확실성,불안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이런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늘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내일을 대비하는 일이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그 얘기가 굉장히 마음에 와 닿았어요. 좀 다른 얘기를 하자면 월급쟁이로서 가장 큰 비애는 '저 양반 있을 때 좀 더 잘했으면'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라고 생각해요. '회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 늘 앞이 깜깜하죠. 가장 행복한 월급쟁이는 떠날 때 박수를 받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떠나는 날 후배들이 '잘하겠습니다'라고 말해 주면 무척 행복할 것 같아요."

-돈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어머니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있어요. 돈이 사람을 좇아야지,사람이 돈을 좇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계산기 올려 놓고 두드려 본 기억은 전혀 없어요.그저 쓰는 것을 지혜롭게 잘 쓰면 (월급을) 많이 받는 것 못지않다는 생각은 하죠. 젊었을 때 쌍둥이를 낳고 키우려니까 분유값이 만만치 않더군요.그래서 월급이 들어오면 한 달 분유값을 우선 떼어 놓고 생활했어요.그랬더니 생활이 되더라는 겁니다.쓰는 지혜가 버는 지혜보다 더 소중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세 자매를 두셨죠.

"위로 쌍둥이 두 딸이 있고 터울이 많이 지는 늦둥이 막내딸을 뒀어요. 저는 거의 방임형으로 키웠는데 큰 아이들에게는 딱 두 가지만 주문했어요. 첫째 먼훗날 후회할 일은 가능하면 하지 말자. 둘째 여자라도 평생 자기 일을 가지라고요. 항상 마음이 '짠'한 건 늦둥이예요. 제대로 챙겨 주지 못했거든요. 두세 살 말도 제대로 못할 때 회사에 가려고 하면 '아빠 안 가면 안 돼' 하면서 울며 매달리는데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제주도 흰고무신 클럽

-어린 시절 얘기 좀 해 주시죠. 제주도에서 굉장히 유명하시다고 들었는데.

"어렸을 때는 반항아적 기질이 좀 있었어요 당시에 흰 고무신은 어른들만 신는 거였는데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흰 고무신을 신고 바닷가에 놀러가곤 했죠.(허 사장은 5명의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찍은 색 바랜 흑백 사진을 보여줬다) 머리도 장발로 기르다가 체육 선생님에게 잘리기도 하고 말 안 듣는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언제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하셨나요.

"공부는 계속 했어요. 어렸을 때도 독한 구석이 있었죠. 제가 어릴 때 제주도는 생활이 상당히 어려웠어요. 대부분 농사를 지어서 생활했는데 다른 식구들은 모두 일하는데 저는 공부를 했죠. 지금 생각하면 일하기 싫어서 공부하는 척한 것 같기도 해요. (웃음) 아무튼 새벽 4시에 깨워 주지 않으면 어머니를 닦달하기도 했으니까 독종인 셈이었죠. 아직까지 그 버릇이 남아서 새벽 4시만 되면 자동적으로 깨요. 지금은 아침 시간을 이용해 주로 걷는 편이죠."

-제주 오현고를 졸업하셨죠.

"당시 성공이란 건 상고를 나와서 은행원이 되는 것이었어요. 그게 가장 안정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어요. 사실은 군인이 되고 싶었는데 상고를 가면 육군사관학교에 갈 수 없었거든요. 주위에서는 면 소재지에서 무슨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냐며 말렸는데 저는 고집을 꺾지 않았죠. 합격자 발표날 맨 윗줄 앞부터 뒤까지 훑었는데 이름이 없더라고요. 좌절하고 돌아서려는데 둘째 줄 맨 앞에서 제 이름을 찾았어요. 차석이었죠."

-별로 실패를 경험하지 않으셨을 것 같네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생회장 선거에 나갔다가 낙선한 적이 있어요. 연설문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단상에 올랐다가 망신만 당했죠. 그리곤 처음으로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셨는데 필름이 끊겼어요. 필름이 끊긴 일은 살면서 두 번 있었는데 그 날이 그 중 하나였죠."

#아직 할 일이 많다

-앞으로 해 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하고 싶은 게 두 가지 있어요. 첫째로 한국은 제품 위주의 마케팅은 상당한 수준에 올랐는데 부품 쪽은 참 허약해요. 기본이 약하고 성공 체험도 별로 없죠. B2B 분야에서의 '마케팅 로직'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두 번째는 IT(정보기술),소프트웨어 다 좋지만 우리나라는 굴뚝 산업이 반드시 있어야 해요. 부품 사업의 경쟁력을 키워서 이 굴뚝 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어요. 이거 너무 거창한가요.하하하."

정리=유창재/사진=김병언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