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기자들이) 많이 나오셨네요?" 이종수 현대건설 사장(58)은 지난달 29일 저녁 회사 인근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한 음식점에 트레이드 마크인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들어서며 이렇게 첫마디를 던졌다.

연매출 5조원에 38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한국 최대 건설회사의 최고경영자(CEO)이건만,이 사장은 한국경제신문 건설부동산부 기자들과 만나 "살아온 얘기를 남들 앞에서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다소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쓸 만한 얘깃거리가 있는지나 모르겠다"며 대화를 시작했지만,얼마 가지 않아 좌중에 웃음소리가 잇따라 터져 6시간이 넘게 이어진 자리는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 한경기자들과 6시간 솔직 토크


-요즘 'CEO 세상사는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사장님이 나오기 때문에 임직원들도 아주 좋아하죠.

"나는 워낙 평범하게 살았어요. 연애도 못해봤고…. 별로 굴곡진 일이 없어요. 드라마 같은 스토리는 기대하지 말아요."(웃음)

-사장에 취임하신 지 1년2개월이 됐습니다. 올해는 창립 60주년이기도 한데 소감이 어떠세요.

"난 별로 내세울 게 없는데 사람들이 현대건설 사장이라니까 대단하게 봐요. 사실 내가 1인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부서장을 할 때도 회사의 명에 따라 책임과 역할을 했을 뿐 골목대장 같은 역할을 하지는 않았죠.사장도 마찬가지예요. 직책에 따라 맡은 역할을 하는 자리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올해가 현대건설 창립 60년인 동시에 한국건설 60년으로,이런 뜻깊은 해에 CEO 자리에 있다는 게 큰 영광이죠.막중한 책임감도 느끼고요."

-현대건설 사장이라면 보통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그런 걸 기대하는 직원들도 있지만,그건 아니라고 봐요. 사장이라고 쥐고 흔들면 임직원들이 활동을 못하거든요. 임원들에게 '점심 먹게 언제 어디로 모여라!'는 식의 말을 하면 각자 약속을 취소해야 하고,그러면 회사의 대외 네트워크에 해가 될 수도 있죠.이제는 그런 딱딱한 카리스마가 빛을 보는 시대는 아니라고 봅니다."

-어쨌든 지금은 회사의 1인자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죠.하지만 누구나 어떤 부서에서든 1인자입니다. 자기가 맡고 있는 직책이나 역할에서 보면 모두 그렇죠.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고,CEO는 후배 직원들이 열정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이죠.실제로 카리스마가 넘치던 고 정주영 명예회장께서도 후배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며 늘 처음처럼 열정을 유지할 수 있게 배려했어요. 그게 CEO가 할 일이죠."

-해외 현장에 많이 나가시죠.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 등 중동지역과 동남아를 자주 다닙니다. 작년 5월엔 하루에 3개국을 간 적도 있어요. 두바이에 갈 때는 금요일 밤 비행기를 주로 이용해요. 그러면 금·토요일(현지시간)에 현장을 둘러보고 일요일 밤에 돌아올 수 있죠.시차 때문에 하루를 벌 수 있어요."

-해외에서는 주로 어디에서 묵으세요.

"처음 두바이 현장을 갔더니 현지 직원들이 쉐라톤호텔의 큰 방을 잡아놨더라고요. 방값이 무척 비싼 곳이죠.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했죠.그냥 편히 쉴 수 있으면 됐지,하룻밤 묵는데 그렇게 고급스런 방은 필요없잖아요. 그렇지만 비즈니스할 때는 다르죠.발주처 등에서 내가 어떤 호텔에 묵는지 알아보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수주하려는 회사 사정이 어떤지 체크하는 거예요. 그럴 때는 최고급 호텔에 방을 잡죠.비즈니스할 때는 그런 것도 신경써야 돼요."

-(비서가 테이블에 이 사장의 젊었을 때 사진들을 늘어놓았다) 학창시절에는 정말 미남이셨네요.

"와,이거는 어느 때 사진이야.우리 직원이 나 몰래 집에서 찾아왔나 보네요. 더 좋은 사진도 있는데 그런 것은 별로 안 가지고 온 것 같네.(모두 웃음) 젊었을 때는 잘 생겼다는 얘기도 들었죠.요즘엔 머리가 많이 빠져서….신문에 사진 실을 때는 '뽀샵' 좀 해주세요."

-본적이 서울 성수동이던데요.

'힐스테이트' 브랜드를 단 아파트를 뚝섬에서 처음 분양하신 것은 혹 그 때문인가요.

"(손사래를 치면서) 아니에요,우연히 그렇게 된 거죠.조부와 부친께서 성수동에 사셨고,나는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어요. 국민학교 2학년 때 서울 장충국민학교로 전학왔죠.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한남동으로 이사했지요. 장충동·한남동에 살았다고 하면 다들 지금 상황만 생각하고 부자 동네에 살았다고 부러워하더라고요. 거기에 살긴 했지만 부자는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그런 말을 들으면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죠."(웃음)

-당시 집값은 얼마였나요.

"모르지.어려서 안 알아봤으니까."(모두 웃음)

-공부는 잘하셨나요.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잘했어요. 6학년 때는 반에서 1등도 했고.아마 전교에서도 1등이었을 걸요. (웃음) 하여튼 국민학교 땐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어요. 그런데 중학교 지원할 때쯤 당시 선생님이 어느 학교를 보내야 할지 상의하려고 어머니를 부르시더라고.선생님은 K중학교를 추천했는데,어머니께서 좀 겁이 나셨는지 서울중학교에 보내겠다는 거예요. 그때 반에서 2등 하던 친구가 K중학교에 갔으니 당시로서는 하향 지원이었죠.그런데 나는 그게 더 잘 됐다고 봐요. 학교도 넓고 학풍이 리버럴하고 좋았거든."

-학창시절을 모범생으로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무난했죠.그런데 3학년 때 일이 생겼어요. 원래 이 얘기는 아무한테도 안하는데….당시 고3이 되면 대입 모의고사를 치렀는데,나도 모르게 문과에서 전교 1등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게 문제였어요. 그 뒤로는 이상하게 집중이 안 되더라고요. 머리가 아프고,공부도 안 되고….1등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나 봐요. 시험을 볼수록 성적이 떨어졌죠.그러더니 2학기 들자 학교 가기도 귀찮고 해서 결석도 많이 했어요."

-대학은 어느 곳을 갔습니까.

"고3 담임 선생님이 이 성적으로는 서울대 법대나 상대보다는 점수가 낮은 데를 가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법대나 상대를 가고 싶어 오기를 부려서 서울대 상대를 지원했어요. 결국 떨어졌죠."

-재수하면서 '사고'치신 적은 없으세요.

"술·담배를 그때 배웠죠.재수할 때는 공부 잘 안하잖아요. 유지하기만 해도 잘하는 거지요. 재수할 때 무교동에서 막걸리 마시며 놀던 기억이 나요. 무교동 열차집이라고 당시에는 유명했던 집이 있어요."


-대학 생활은 어떠셨어요.

"대학 때는 공부 별로 안 했어요. 우리 세대가 아마 대학 때 공부를 가장 안 한 세대가 아닌가 싶어요. 반독재 투쟁으로 한창 시끄러웠던 때잖아요.요즘 대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한다던데,그땐 하루가 멀다 하고 데모하고 그랬어.휴교도 많이 했고요."

-학군 장교(ROTC)로 군 생활을 보내셨던데요."대학 3학년 때 ROTC에 지원했어요. 당시 학군장교 제도가 폐지됐다가 2학기 되니까 부활됐어요. 원래 ROTC 지원자가 많지 않았는데 제가 지원할 때는 동기생들 중 지원자가 꽤 많았어요. 보통 2년 해야 임관했는데 당시는 부활됐던 터라 우리는 1년6개월이면 가능했거든요."

-계산이 빠르셨나 봅니다.

"그런가요? 여하튼 군대 가서 사람이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변했죠.임관할 때 시험을 따로 봐서 통역 장교로 입대했어요. 광주 포병학교에서 훈련받았는데,장교 정복을 입고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무조건 뛰라는 거예요. 결국 송정리 역에서 포병학교까지 밤새도록 뛰었죠.그렇게 군기를 잡더라고.더군다나 통역 장교라니까 나중에 군생활 편하게 할 거라며 훈련도 고되게 시켰죠.유격 훈련도 가장 먼저 받고."

-현대건설에는 어떻게 들어가시게 됐습니까.

"동양방송 경리부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는데 현대건설에서 경력 사원을 뽑더라고요. 29세 때죠.건설회사에 가면 해외도 자주 나갈 수 있다기에 지원했어요. 경력 사원이어서 시험도 안 보고 입사했죠."

-그래서 해외에 나가셨나요.

"본사 경리부에서 2년 정도 근무한 뒤 리비아로 발령이 났어요. 리비아에서 도로 공사를 땄는데 지사 개설 선발대로 뽑힌 거죠.우리와 수교가 안 된 상태라 스위스로 가서 1주일 만에 비자 받아 들어갔어요. 리비아 공항에 도착했는데,정말 암담했죠.영어로 된 간판조차 하나 없어서 사방팔방 어디가 어딘지 알 수도 없고.미리 알았다면 절대로 안 갔을 거예요. 2년 동안 참 고생 많이 했어요.그래도 그때 생각이 많이 나요.피곤한 줄도 모르고 밤새도록 일하곤 했어요.당시에 같이 고생했던 동료들끼리 모임(리비회)을 만들어서 지금도 만납니다. 작년에 리비아 갔었는데 건물만 몇 개 더 늘었지,별로 안 변했더라고요."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1977년에요. 동양방송 다니던 시절이죠.친한 친구가 자기 여동생 (이화여대) 졸업식에 가자는 거예요.1976년 2월이었을 거예요.거기서 친구 여동생의 대학 친구인 집사람과 처음 인사했어요.학사모를 쓰고 있었죠."

-첫눈에 반하신 것은 아닙니까.

"집사람이 반했겠지(웃음).처음에는 친구가 언제 만날지까지 주선해 주고 그랬어요. 아무튼 그래서 또 만났지.집사람이 당시 교회 성가대에 다닐 때라 일요일에 주로 만났어요. 매주 교회로 찾아가서 설교 듣고,집사람이 성가대 연습할 시간에는 교회 옆 찻집이나 빵집에서 기다렸다가 데이트하고 그랬죠."

-결혼 후 회사 생활은 어떠셨어요.

"리비아에서 귀국한 뒤 급여 과장으로 잠시 일하다가 1982년 9월에 자금 과장이 됐어요. 힘이 센 자리였죠.하루에 수천억원을 만지는 데다 협력업체 공사 대금을 현금으로 결제할 수도 있고 어음을 줄 수도 있는 직책이었거든요. 자금 과장만 3년을 했어요.최장수였죠."

-귀국 후에도 자금 관련 업무를 하셨나요.

"처음에는 재정부에 배치됐는데 며칠 만에 기획실로 발령 났어요.1989년부터 2002년까지 기획실,인사부에서 근무했어요.그때 참 일 많이 했죠."

-당시 현대건설에 쟁쟁한 인재가 많았던 때였죠.

"그래요.당시엔 건설업계에서 현대건설이 독보적인 존재였어요.다른 건설회사들이 우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인재도 많이 들어왔죠.그래서 현대건설이 지금까지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게 사람이잖아요."

-돌아가신 정주영 명예회장과 관련된 전설적인 얘기들이 많지 않습니까.

현대건설에서는 엘리베이터 앞 '30초 브리핑'을 잘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던데요.

"맞아요.명예회장께선 머리가 정말 비상한 분이셨어요.집무실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짤막한 브리핑을 듣고는 나중에 반드시 체크하실 정도였으니까요.임원들 사이에서는 '30초 브리핑에 승부가 갈린다'는 말이 돌기도 했지요.당시 명예회장께서 아침 6시30분이면 출근하셔서 계열사 사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으셨는데,저를 포함한 세 명은 일일 보고 때문에 매일 비상이었죠.그래서 항상 6시 전에 출근했어요.명예회장께서 계동 현대사옥으로 출근하시면 당시 사장께서 매일 일일 보고를 했지요.그러니까 1998년 말부터 2000년까지 2년 동안 매일 첫차로 출근한 셈이지요.요즘은 그때보다 한 시간 늦은 7시에 출근하니 얼마나 좋은지."

-취임하신 지 1년2개월이 됐는데 CEO로서 고민도 많으시죠.

"순간 순간 고민이 많아요.특히 직원을 정리해야 할 때가 가장 고민스러워요.사고가 나거나 비리에 연루돼 인사 고과에 따라 정리할 때,참 힘들죠.몇십 년 동안 같이 일하고 가족들이 왕래하기도 하던 사람들이잖아요.저 역시 회사 그만두고 나면 그 분들과 밖에서 만날 테고….하지만 회사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개인적인 사정이나 친소 관계 때문에 원칙이 깨지면 조직이 유지될 수 없어요.사실 제가 정리한 직원들이 많습니다.그 대신 불가피성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이해를 구하죠."

-젊은이들이 사장님처럼 살면 성공할 것 같습니다.

"제가 살아 온 것과 요즘 사는 것하고는 방식이 달라요. 요즘 젊은이들이 저 같은 삶을 살면 실패할 확률이 100%일 수도 있어요.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열정과 도전의식이죠.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그래서 저는 신입 사원을 포함한 직원들에게 비전을 주려고 노력합니다.5년,10년 뒤에 내가 어떤 모습이 돼 있을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죠."

-건강은 괜찮으세요.

"주위에서 나보고 CEO 엔돌핀이 나오는게 아니냐고 이야기하더라구요(웃음).하루에 4~5시간 자면 충분해요.숙면을 취하거든요.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골프 실력은 어느 정도 되세요.

"잘 못 쳐요.캐디를 잘 만나면 90대 중반 정도 하나? 1988년인가 말레이시아에 있을 때 처음 배웠는데 열심히 안 했어요.귀국해서는 한동안 못하다가 1998년쯤에 다시 시작했어요."

-다시 기회가 주어져도 건설회사에 다니실 건가요.

"그럼요.무(無)에서 유(有)로 가는 과정.나는 그게 정말 좋아요."

정리=강황식/임도원 기자 his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