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18일 리비아 대수로청에서 팩스로 보내온 요구 사항을 뜯어본 이국동 대한통운 사장은 충격에 휩싸였다. "비행기 안에서 처음 공문을 봤어요. 대수로 공사의 하자 보수 기간을 완공 후 50년으로 해달라고 씌여 있더군요. 중간 기착지인 독일 함부르크 호텔에서 머물며 그 공문을 다시 읽었는데 너무 황당해서 글씨가 눈에 잘 안들어 올 정도였습니다."

이 사장이 당황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이 사장은 2004년 12월27일 리비아 대수로 공사의 잔여분을 대한통운이 독자적으로 맡은 이래 작업이 순조롭게 끝나고 있던 터라 예비완공증명서(PAC)를 받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50년 보수'는 지금껏 대한통운의 발목을 잡아 온 '리비아 리스크'라는 악령을 다시 불러오는 것과 다름없었다.

동아건설이 부도를 면하기 위해 대한통운을 흡수 합병하려했던 2000년,직원들과 함께 결사 반대했던 일에서부터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잔여 공사를 독자적으로 마무리 한 일 등 그간의 어려움들이 이 사장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럴 바에야 2억7000만달러의 우발 채무(애초 13억달러였으나 대한통운이 잔여공사를 마무리하면서 금액 감소)를 갚고 손을 떼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장은 리비아에 도착하자마자 '정면 돌파' 전략을 쓰기로 생각을 고쳐 잡았다. 1979~88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는 만큼 누구보다 중동 사람들의 특성을 잘 안다는 자신감이 그를 이끌었다. "원래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담당하는 위원회에 참석하는 게 공식 일정이었는데,불행 중 다행으로 가우드 대수로청 장관을 독대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첫마디부터 '50년 보장하라고 하면 안 하겠다'고 강하게 밀어붙였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 물류를 맡으며 중동 사람들과 겪었던 각종 관행까지 일일이 들어가며 '50년 보수'의 부당성을 지적하자 가우드 장관도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대한통운은 △2005년 6월30일자로 실질적인 공정이 완료됐음을 인정해 줄 것 △수로관의 보증 기간을 1년으로 한정할 것 △공사완료에 들어가는 비용은 리비아에 투자한 현지 자산으로 충당할 것 등 3가지 원칙을 이끌어내고 3개월 뒤인 12월,PAC를 손에 쥐게 됐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대한통운 '리비아 리스크' 해소 일지=2000년 10월 동아건설 부도 처리,자산을 지급보증으로 세웠던 대한통운 13억 달러에 달하는 우발채무 짊어짐→2000년 11월 회사정리절차 개시 결정→2004년 12월27일 대수로 공사 전 과정을 독자적으로 인수,우발채무를 2억7000만 달러로 줄임→2005년 12월 PAC 획득→2007년 하반기 최종완공증명서 획득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