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제시문 100선] (26) 라인홀트 니버 '그리스도인의 윤리'

요즘은 종교가 사람 사는 데 꼭 필요한지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도 많고, 그런 의미에서 현대는 종교의 시대가 아니다.

그러나 종교의 빈자리를 메운 이성의 윤리가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믿음의 힘이 세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미운 사람의 인형을 만들어 바늘로 찌르던 장희빈의 주술(呪術)은 원시사회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다.

종교(宗敎)란 가르침이다.

교사(敎師)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성인(聖人)이 백성을 교화(敎化)하듯, 그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윤리문제-무엇이 올바른 삶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종교가 사회의 올바름을 가르칠 때 인간은 집단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어떤 종교든 남을 어떻게 대하며, 무엇이 정당한 권력이고, 부(富)를 어떻게 얼마나 획득하고 보유하고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부처님도 정치나 경제에 대해 한두 마디쯤 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제도를 자꾸 바꾼다는 점이다.

새 학년이 되면 담임교사가 늘상 하는 일처럼,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근대 사회를 형성하게 되자 중세 사회의 윤리를 담당하던 종교도 새로운 명찰을 달아야 하게 되었다.

신의 명령 대신 합리적 사고와 판단력에 의지하는 이 불경한 존재들과 그 집단의 욕망을 향한 질주를 어떻게 해석하고 끌어 안을가를 답하기 위해 교회도 변신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우여곡절(종교개혁)을 거쳐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답변은 대략 ‘성실’과 ‘금욕’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혁명으로 얻은 자유를 쉽게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다.

압제와 불평등을 벗어나려는 자에게 ‘성실’과 ‘금욕’이 어찌 행동원리가 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자유주의 정치이념과 정통 기독교윤리는 이혼과 결혼을 반복해 애증이 교차하는 남녀와도 같은 관계에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기독교도 나오고, 그에 대한 반성도 나온다.

니버는 반성하는 쪽이다.


◆원문 읽기


어떤 사회 상황에서나 인간에게 있는 이상적 가능성은 항상 자유와 평등의 관점에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최고 선은 아무런 방해 없이 그들 본성의 본질적 잠재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자유로 이뤄진다.

인격이란 훈련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그러나 이상적인 훈련은 스스로 부과하는 것이다.

적어도 인간의 삶의 궁극적 가치 함양 이외 다른 어떤 동기를 가진 대행자들에 의해 부과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삶의 좀 더 충분한 발전 기회를 위해 서로 경쟁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차선의 최고 선은 평등이다.

왜냐하면,경쟁하는 개인들의 가치를 동등시하는 원리 외에는 상충하고 있는 인간의 이해 관계를 중재할 최종적인 원리가 없기 때문이다.

▶해설=니버의 견해에 의하면 자유주의적 낙관론은 두 가지 면에 기초하고 있다.

즉,인간 사회의 큰 악은 무지와 이기주의인데,무지는 교육을 통하여,그리고 이기주의는 그리스도교의 희생적 사랑에 호소할 때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견해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환상인가를 니버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이해 관계에 근거해 있다고 보며,정치는 이해 관계의 집단적 표현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검약하고 겸손한 종교인은 타인에게 자선을 베풀 수 있을지 몰라도,사회적·집단적 이해 관계에 있어서는 양심이나 윤리가 아닌 강제적 권력의 작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역할이 제한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합리성과 종교성이 가지는 영향력은 개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작용하나 집단적인 정치 윤리에 있어서는 작용할 수 없다.

더구나 국제 관계에서라면 국제 도의란 추호도 있을 수 없고 오로지 이해 관계의 연속일 뿐이라고 한다.

니버는 이해 관계가 무한 충돌하는 정치 현실에 대해 유명한 권력 정책(power politics)을 제시한다.

민주 사회에서 사회 정의는 정치적인 현실을 바로 파악하고 권력을 조직하여,소외된 자가 권력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아,권력이 분산됨으로써 균형과 견제가 생겨날 때에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권력이 다른 권력을 파괴하기 위해 노력하는 순환 구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가치가 끝까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문 읽기

모든 도덕 법전과 도덕 철학은 타인의 삶과 복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고 명령하며,타인과 대립하는 자신의 이익에 대한 부당한 주장을 억제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웃의 삶이나 재산을 탈취하는 것은 나쁘다는 아주 보편적인 합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 행위의 이 같은 최소한의 표준은 사랑의 법에 근거하며,그 궁극적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긍정하고 보호할 의무는,삶이란 통일성과 조화 속에서 다른 삶과 상호 연관된다는 가정 아래서만 일어날 수 있다.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고상한 의무감보다는 가장 타산적인 신중성의 동기가 그 표준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삶을 보호하도록 해 주는 상호성의 과정들을 보존하기 위해서만 이웃의 삶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전체 상황의 분석에서보다는 자신들에 대한 관심에 의해 삶의 상호 관련성을 발견해 왔다는 것만을 의미한다.

이 아주 신중한 접근이 가장 일관성 있는 사회적 행위를 고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부정하는 것 같은,즉 삶의 법칙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암암리에 긍정할 것이다.

▶해설=윤리의 최종적이고 궁극적 목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 현실에서 이 '사랑의 법'이 적용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사랑이 하나님의 뜻으로 현실임을 믿으며,비록 사랑의 이상이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 목표를 향해 책임을 느끼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산다.

그런데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은 눈앞의 현실에서 너무나 희귀하다.

오히려 나의 이익을 침해한 자를 적으로 규정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자유 경쟁은 자본주의의 제1원리이고 이기심은 발전의 동력이다. 아무리 이상주의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지침으로서 기능한다지만,그 괴리가 심하면 이상주의도 패배를 선언해야 하지 않을까? 완전무결한 예수의 '사랑의 법'과 이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현실 사이에서 기독교 윤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니버는 이렇게 말한다.

완전무결한 사랑의 규범은 역사 속에서 실현될 수 없지만,언제나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되므로 이 규범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사랑의 법'이 적용될 수 없는 정치 현실 앞에서 우리는 그 목표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정의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접근이지 완성이 아니기 때문에, 궁극적 사랑의 규범을 향하여 자기의 공동체 구성원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긴장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긴장이 사라지는 날 그리스도교 윤리는 타락하고 만다.

이 접근설의 이론은 앞서 본 권력정책의 이론과 더불어 니버 사상의 중추이다.

불가능한 윤리를 가능한 것으로 실현하려는 그리스도교 신앙 속에 니버의 긴장된 윤리 의식이 설정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니버의 윤리는 그의 유명한 말대로 '불가능한 가능성의 윤리(An Ethic of Impossible Possibility)'다.

니버의 다른 책으로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기독교가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방법을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신과 자본주의의 윤리』를 읽어 보기를 권한다.

윤대경 S·논술 논술연구소장 ydkby@nons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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