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비즈니스> 11주년 기념호(12월 18일자·12월11일 발간) '나의 아버지!' 코너에 전경련 회장이자 아버지인 강신호 회장에 대한 강문석 수석무역 부회장의 애틋한 마음이 담긴 글이 실렸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한경비즈니스>가 지난해 말부터 연재하고 있는 기획시리즈로 각계 명사들이 아버지를 회고하는 글을 매주 게재하고 있습니다.

강부회장은 강신호 회장이 최근 이혼한 부인의 아들(차남)로 일각에서 강회장과의 갈등설을 제기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강부회장은 본지의 거듭된 요청에 여러 차례 거절하다가, 이번에 귀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권오준 한경비즈니스 기자 jun@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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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일깨워준 경영자의 도리


원고 청탁을 받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전경련 회장이신 아버지는 내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재계를 대표하는 어른이시다. 더구나 나와 아버지 사이를 두고 이런 저런 말들이 나도는 상황에서 괜한 오해를 사지 않을까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나 ‘좋은 추억을 적어주시면 됩니다’라는 기자의 거듭된 요청에 ‘그러지요’라고 답하고 말았다. ‘좋은 추억’이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자 갑자기 아버지와의 이런 저런 추억이 하나 둘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엄하신 편으로 기억된다. 간혹 당신이 ‘아니다’라고 생각되시는 일에는 매를 드시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세대가 아버지들에게 흔히 갖는 ‘엄부’의 이미지를 나 역시 갖고 있다. 물론 자상한 면이 더 많으셨다. 아버지는 회사 야유회에 나를 꼭 데리고 다니셨다. 당시 아버지와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찍었던 사진들은 아직도 사진첩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초등학교 입학 전으로 기억되는 데 아버지는 나를 회사의 어린이 비타민 광고에 출연시키기도 하셨다.

특히 아버지는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공부를 꽤 잘한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서울대 입학시험에 합격했을 때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때때로 아버지는 해외출장을 가실 때 대학생이던 나를 데려가곤 했다. 한번은 독일 베를린에서 ‘발리’ 구두를 사주신 적이 있는데,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독일 유학시절에 입었던 바지를 물려받아 입고 다니던 나로서는 명품 브랜드로 통하는 발리 구두를 선물받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뉴저지에서 외국계 회사에 다닐 적 첫 아이를 출산했을 때도 아버지는 그 바쁜 와중에 미국까지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

경영자로서의 아버지는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동아제약에 입사했을 때도 아버지는 특혜를 주지 않았다. 말단사원으로 시작해 한 계단씩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가 경영상의 입장 차이로 마찰이 있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나는 동아제약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선 적이 있다. 32개의 계열사 중 부실한 곳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모기업인 동아제약마저 위태롭다는 판단이 섰다. 아버지는 당신이 애정을 갖고 있는 회사들이 문을 닫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인지 무척 꺼렸다. 그러나 과감한 구조조정 덕분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동아제약이 더 강한 체질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영에 참여시키지는 않으셨다. 능력주의 인사원칙을 철저히 지켰고,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2004년 여름 갑자기 ‘경영에서 손을 떼라’고 말씀하셨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아버지의 갑작스런 말씀에 의아함이 컸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그리고 작은 규모나마 회사를 직접 맡아 독립적으로 경영해 보니 아버지의 고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항상 회사의 미래를 먼저 보고 미리 준비하는 것이 리더의 막중한 임무임을 새삼스레 느끼게 됐다. 이처럼 소중한 경험의 기회를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크다.

세상이 뭐래도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다. 세월이 천년만년 흘러도 내 아버지가 바뀔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누가 뭐래도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르는 마음이 변함없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자식의 도리와 경영자의 도리가 같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도 든다. 경영자는 임직원과 주주와 고객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치도 사실은 아버지에게 배운 경영자의 덕목 가운데 하나다.

사람들의 일이란 간단치가 않다. 말 못할 속사정 하나쯤은 누구나 갖고 있게 마련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진심’이 아닐까 싶다. 진심은 하늘이 알아준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나는 직원 주주 고객의 이익을 충족시킬 뿐더러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기업으로 우뚝 서는데 최선을 다한 경영자로 기록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아들로 기억되고 싶다.


글 / 강문석 수석무역 부회장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나와 스탠퍼드대 대학원과 하버드대 MBA를 졸업. 동아제약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위스키 및 와인을 수입, 판매하는 수석무역의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