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인하를 포함한 경기부양책을 놓고 정부·여당과 한국은행의 갈등이 심상치 않다.

금리 인하 필요성에 대한 정부·여당의 압력이 거세지는 가운데 한국은행도 반격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부양의 필요성에 대한 정부·여당과 한은의 입장이 다른 것은 '경기 침체 원인에 대한 진단'에서부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여당은 '소비 부진'을 우려하는 반면 한국은행은 '설비투자 부진'을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저금리가 부동산거품을 초래한 주범'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26일 부산대 강연에서 '경기부양책으로서의 금리 인상'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콜금리가 연 4.5%에 불과하다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정치권과 정부에서 경기 부양을 위한 '금리 인하'를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이 총재는 거꾸로 '금리 인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정치권과 정부를 겨냥해 직격탄을 날린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총재는 그동안 우리나라의 적정 금리 수준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껴왔다.

한은 총재의 발언은 채권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날 "균형금리가 아무리 낮아도 6~8% 수준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국고채 금리가 연 5%를 밑돌고 있는 상황에서 균형금리의 구체적인 수치까지 거론한 이 총재의 발언은 중앙은행 총재로서 '구체적인 금리 수준을 거론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禁忌)까지 깼다.

그 대가로 이 총재가 얻으려 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강연에서 "2000년 초반에 미국을 비롯 한국 등 대부분 국가들이 금리 인하 등 경기 부양에 나섰지만 그 결과 아파트담보대출과 신용카드 빚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고 강조했다.

저금리가 거품을 초래하는 주범이라는 얘기다.

그가 금리의 구체적인 수치까지 거론하면서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는 "저금리는 부동산 거품만 초래한다는 말이야,이 바보들아!"라는 것이다.

이 총재가 우려하는 거품현상이 다시 재연되고 있다는 게 우리 사회에서 큰 골치거리다.

서울 은평뉴타운과 경기 파주신도시의 고분양가 논란,신도시 추가 건설 발표 등으로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상황에서 금리 인하는 불길이 치솟는 들판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는 게 이 총재의 판단이다.

◆경기회복은 규제완화·투자활성화로

이 총재는 최근의 경기 하락에 대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경기사이클에서 상승국면도 있고,하강국면도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경기하강 국면은 시간이 지나면 상승세로 반전하게 돼 있다는 얘기다.

그는 그러면서 설비투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금리 인하를 통해 경기사이클을 조작하기보다는,규제 완화와 투자심리 안정을 통해 기업들의 투자를 유도해 경기가 선순환 구조로 들어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총재의 주장이다.

정부는 투자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기업들은 기술혁신과 신제품 개발,인적자본투자 확대,구조조정을 통한 생산성 향상 등을 이뤄내야 한다는 얘기다.

이 총재가 투자 활성화를 역설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외환위기 이후 설비투자가 극도로 부진했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의 지난해 설비투자는 2000년에 비해 겨우 1.8% 늘어났다.

10년 전인 1996년과 비교해도 지난해 설비투자는 11.4% 늘어나는 데 그쳤다.

우리나라의 연평균 설비투자 증가율은 1971∼80년 19.6%,1981∼90년 12.1%였다.

설비투자 증가율이 최근 10년 동안 10분의 1 미만으로 떨어진 것이다. 1977년 외환위기를 겪은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의 수치는 심각하게 걱정해야 할 '정체상태'라는 게 이 총재의 판단이다.

그가 "경기가 단기적으로 조금 어렵더라도 성장 잠재력 저하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성장잠재력 확충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규제완화에 이중적인 정부·여당

정부·여당 관계자들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업투자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기업의 투자활동과 직결되는 출자총액제한제도나 수도권 규제 완화 문제가 나오기만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력 집중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출자총액제한제도의 대안으로 순환출자금지 방안을 내놓고,하이닉스의 이천공장 증설을 허용하지 않은 것 등은 정부의 이중적인 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부는 경제 체질이 근본적으로 개선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강국면에 접어든 경기흐름을 되돌리는 일을 먼저 하겠다는 것이다.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최근 "현 경기는 불황"이라며 '경기관리'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나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이 "경기 둔화에 대비한 선제적인 금리 인하 필요성"을 언급한 것 등은 정부의 경기관이 '부양'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치권 압력이 변수

이 총재는 지난 8월 열렸던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직후 "(연 4.5%의 콜금리는) 그럴싸하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지난달 24일 한은 국정감사에서 많은 국회의원들이 "콜금리 인상이 잘못됐다"고 질타하자 이틀 후 부산대 강연(26일)에서 "균형금리가 아무리 낮아도 6~8% 수준은 돼야 하며 콜금리가 4.5%에 불과하다는 것은 문제"라고 발언 수위를 한 단계 높였다.

정부와 정치권의 금리 인하 공세가 거세질수록 이 총재의 반발이 더욱 커 질 수 있음을 시사한 대목이다.

경기 부양책을 둘러싼 정부·여당과 한은의 갈등이 일회성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이유다.

내년 말로 예정된 대통령선거가 다가올수록 경기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정치권의 목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다.

어느 나라든지 선거를 앞두고 경기를 인위적으로 부양한 사례가 많았다. 물가 안정을 취우선 정책 목표로 삼고 있는 한국은행이 정부와 정치권의 경기 부양 요구를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콜금리를 인상할 것인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여러분은 이 총재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 것으로 예상합니까.

현승윤 한국경제신문 경제부 기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