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泳世 < 연세대 교수·경제학 >

스페인 장교 코르테스는 1519년 중미 아즈텍에 상륙했다. 코르테스는 500명의 군대로 2000만명을 정복하긴 글렀다고 생각하고 적 내부의 이해관계를 이용해 이간질하고 내분이 일어나도록 유도했다. 스페인의 영향력이 커지자 아즈텍의 적대행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스페인 병사들도 낯선 땅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일부는 배를 훔쳐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코르테스는 아즈텍인들과 스페인 병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자신들의 함선 11척을 깡그리 불태워 버렸다.

언뜻 보기에 미친 짓처럼 보이는 코르테스의 행동은 지극히 전략적이다. 후퇴수단을 없애버림으로써 아즈텍인들에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싸우겠다는 신빙성 있는 위협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었다. 더불어 스페인 병사들로 하여금 죽도록 싸우는 것만이 사는 길임을 확실히 알리는 신호효과를 갖는다. 게임이론에서 배수진(背水陣)이라 부르는 전략이다.

김정일정권의 목표는 독재체제의 유지와 남한의 적화통일이다. 하지만 현저한 국력차이 때문에 정공법으로는 목표 달성이 쉽지 않다. 그래서 남한 내부의 진보·보수를 이간질하고 남남갈등을 유도한다. 괄목할 성과를 거둔다. 한편 테러국가에 무기를 판매하고 마약과 위폐(僞幣)에까지 손을 대자 미국의 적대행위가 늘어난다. 북한주민은 굶주림과 폭정을 견디다 못해 속속 북한을 이탈한다. 마침내 북한정권은 전 세계와 북한주민이 모두 보는 앞에서 핵실험을 강행한다.

코르테스의 함선 소각과 김정일의 핵실험은 이처럼 닮은꼴이다. 코르테스는 이역만리 외진 땅에서 아즈텍만 상대하면 됐다. 그러나 북한정권의 상황은 단순치 않다. 세계 최강국들이 모두 얽혀 있는 복잡다단한 역학관계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북은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북한정권은 그간 미국의 위협이라는 안보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체제 유지를 도모해 왔으나 약발도 다해가고 있다. 군사적 열세를 일시에 만회하고 북한주민들에게 자긍심을 주어 불만을 무마하기에 핵만한 대안은 없다.

물론 북이 핵개발 대신 개혁개방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폐쇄통제 수단에 의존해 온 북의 세습체제는 개혁개방에 취약하다. 루마니아의 차유셰스크나 이라크 후세인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한 지금 김정일정권으로서 개혁개방은 지나친 모험이다.

미국과 북한은 기본적으로 대결구도로 나가리라 예상된다. 북한은 핵폐기물 재처리,제2차 핵실험,미사일 발사 등 벼랑끝전술을 구사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중동지역에 발목 잡힌 미국은 대북(對北) 군사대응이 쉽지 않은데다 전면전 위험도 무시할 수 없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유출을 차단하는데 주력할 것이다. 일본은 강력한 대북제재에 앞장서고 있으며 군사력 증강과 미·일동맹 강화의 계기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은 두 차례에 걸쳐 대북제재 결의안에 찬성했으며 부분제재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붕괴는 원치 않기에 6자회담 재개를 통해 파국을 막고자 최선을 다하리라 예상된다. 더구나 북이 끝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일본의 핵무장과 더 나아가 미국의 묵인 하에 대만의 핵무장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중국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하다.

이제 북핵은 냉엄한 현실이다. 그리고 국가안보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야 하는 지상과제다. 대북제재를 풀고 평화적 대화를 시도하면 북한이 핵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에 우리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북한은 핵무장을 바탕으로 군사위협과 대남공세를 지속하고 동시에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요구하리라 예상된다. 그 과정에서 남남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전쟁억지력은 상호 균등한 세력균형에서만 가능하다. 한국이 미국 핵우산에 편입된 것은 '불행중 다행'이나 우리 운명을 언제까지 남에게 맡길 수는 없다. 냉전시대 미·소 동맹국이 갖고 있던 핵무기는 지구를 수십 번 파괴하고도 남을 분량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상호 핵보유와 억지력이 있었기에 냉전을 거쳐 화해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노벨상 수상자 셸링은 지적한다. 되새겨 볼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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