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2003년 2월17일.검찰의 압수 수색과 함께 시작된 그날 아침은 창립 50주년 행사를 준비하던 SK그룹에는 치욕을 넘어 생존의 갈림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습니다."

SK㈜의 투자회사관리실 재무개선2팀장인 김헌표 상무는 3년반 전 당시 구조조정본부에서 근무하다 'SK글로벌 정상화추진본부'에 합류해 채권단과 굴욕적인 협상에 들어갔던 시절을 이렇게 전했다.

그는 "절대적인 을(乙)의 입장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워크아웃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을 때의 절망 속 환희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기업의 역사는 선택의 순간,위기의 순간,좌절의 순간,승리의 순간이 모여 이뤄진다.

이 같은 장면 장면에 대한 SK그룹 전·현직 임원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SK그룹 50주년 사사(社史) '패기와 지성의 여정'이 4일 발간된다.

SK글로벌 사태로 실제 50주년(2003년)보다 3년 늦게 빛을 보게 된 이번 사사는 전·현직 임원들이 '입사 후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을 회상한 인터뷰를 중심으로 구성한 게 특징.'구성원의 역사가 곧 기업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1953년에는 공장을 짓는 건설회사가 없었습니다.

SK그룹의 모태인 수원 선경직물 공장은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과 종업원들이 최 회장의 마차로 5km 떨어진 광교천에서 돌과 자갈을 일일이 날라다 만든 공장이었습니다."

이용진 전 선경직물 전무(77)가 기억하는 SK그룹의 탄생 장면이다.

이렇게 태어난 SK그룹은 1980년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고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원유 직도입 계약을 체결하며 정유부터 섬유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완성한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지사장을 지냈던 한일상 전 SK글로벌 사장보좌 전무(61)는 "1980년 SK는 1979년의 무리한 투자로 엄청난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고 최종현 회장은 티셔츠 바람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출장을 올 때도 많았다"며 "원유도입 계약을 맺던 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고 최 회장과 라면을 끓여 먹었던 일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김창근 SK케미칼 부회장에게는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인수했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제2이동전화 사업권을 반납하고 그룹이 침통한 분위기에 빠져있던 1993년 말.나에게 한국이동통신 인수를 준비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첫 번째 과제는 출자한도 초과에 대한 예외인정을 받는 일.밤에는 관계공무원을 설득하기 위한 자료를 만들고 해가 뜨면 말단 사무관부터 고위공무원까지 빠짐없이 찾아다녔다.

매일매일의 강행군에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기도 했다."(김 부회장)

검사출신 김준호 윤리경영실장(부사장)에게 있어서는 소버린과의 경영권 분쟁이 단연 최대의 사건이다.

"14.99%의 주식을 갖고 있던 소버린은 2005년 주주총회를 앞두고 임시주총 소집을 청구했다.

법리상으로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정기주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임시주총이 과연 필요한가라는 관점에서 설득력 있는 논리를 개발하고 적극 대응해 재판에서 소버린 청구를 무위로 만들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