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급 말단서 국세청 '넘버3' 오른 박찬욱 서울청장


"후배들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해준 덕에 제가 결실을 보게 됐습니다.역시 가장 고마운 사람은 후배들이지요."

9급 말단 직원에서 출발해 지난 31일 국세청의 '넘버3' 자리인 서울지방국세청장(1급)에 올라 화제가 된 박찬욱 청장(57)."별일 아니다"라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던 그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그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라며 같이 일했던 동료와 후배,발탁 인사를 한 전군표 국세청장에게 모두 공을 돌렸다.

그렇지만 국세청 내부에선 실력이나 인품을 따져볼 때 "당연히 될 만한 사람이 됐다"며 이구동성으로 그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박 청장은 한국 사회의 '출세코드'인 지연(경기도 용인),학연(경동고 명지대)과는 동떨어진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는 소문난 일벌레다.

"늘 조용히 있지만 일은 기막히게 진행한다"는 게 직원들의 평이다.

"1968년 1대 이낙선 국세청장 때부터 현재 16대인 전군표 청장까지 38년간 열여섯 분의 청장을 모시면서 항상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일해 왔습니다. 내가 맡은 일은 상사는 물론 동료나 부하들에게도 전혀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6급 주사 때 사무관 시험을 치르고 나면 대부분 일선근무 발령을 기다려 일을 대충 하지만 그는 시험 다음날에도 밤 11~12시까지 변함없이 일했다고 한다.

타고난 성실성 때문에 '일을 만들어 하는 사람'이란 평가를 듣는 박 청장은 업무능력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지난해 대구지방국세청이 시작한 포스코 세무조사는 박 청장이 이끄는 서울청 조사4국이 나선 뒤에야 원만히 완료됐다.

또 외국계펀드에 대한 세무조사도 역시 '구원투수'로 나서 소리없이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박 청장은 "끊임없는 자기계발 만이 공무원의 살 길"이라며 "실력 없이는 양질의 납세서비스도,공정한 과세도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세법이나 회계학은 물론 국제조세나 새로운 금융상품 등에 대해 계속 공부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끈질긴 집념과 납세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덧붙여져야 국세공무원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지요."

그는 국세청 사무관만 되면 세무사 자격증을 자동으로 부여하던 시대에 근무했지만 6급 주사 때 시험에 응시해 당당히 자격증을 따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면서 어렵사리 야간 대학도 마쳤다.

그렇게 공부를 한 이유는 간단하다.

세무사 자격증은 임용된 뒤 본청에 들어와 보니 세무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많아 자극을 받아서 땄고,대학은 취직을 하고 나니 더 배우고 싶어서 다녔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직원들은 이런 그를 "형같은 사람,늘 똑같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부하직원이 잘못하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합니다. 호통 한번 치는 것을 못봤을 정도"라는 게 한 직원의 말이다.

박 청장이 고등학교를 마친 뒤 곧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성장 환경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1949년 경기도 용인 수지에서 태어난 그는 출생 직후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다.

고등학교는 서울 삼촌집에서 마쳤다.

1968년 9급 세무공무원 공채에 합격했지만 22살 때 어머니마저 잃어 효도의 기회를 놓쳤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홀로 농사를 짓다 얻은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지요. 논밭을 팔아 도회지에서 조금 편히 사실 수 있었는데 끝까지 농사지으며 사신 어머니 덕에 1990년대 말에 토지가 수용되면서 보상금을 꽤 받았습니다. 보상금을 받아들고 어머니 생각에 얼마나 울었던지…."

세무공무원이 됐어도 그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일선 세무서 공무원이라면 관할 납세자들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한 지인은 "저마다 일선 세무서 근무를 궁리하고 있을 때 박 청장은 사무관으로 승진할 때까지 6개월만 현장에 나가 있었을 뿐 16년간을 본청에서 묵묵히 일만 했다"며 "그를 '청정해역'으로 부르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5월 조사국장 시절 장남을 결혼시키면서 하객들로부터 축의금을 전혀 받지 않았다.

38년간 누구보다 많이 직원들의 경조사를 쫓아다녔고 동료들도 신세 갚을 기회를 줘야 한다고 했지만 모두 고사했다.

고위공무원으로서의 몸가짐도 그만큼 철저하다.

"38년간 익혀온 경험을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하는 것이 서울청장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지요.후배들이 나를 딛고 발전해 유능한 세무공무원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9급 출신 공무원의 신화를 이룬 박 청장.그는 이제 1만7000여명 국세청 직원의 93%를 차지하고 있는 일반공채 직원들의 '희망'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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