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연수중 감전사한 아들 이야기..ESL에서 시작

대학 진학을 앞두고 한국으로 모국어 연수를 떠났다가 감전사한 외아들을 가슴에 묻은채 세상이 무너지는 절망을 딛고 일어선 60대 한인 여성이 영어 기초반에서 시작한 영어로 쓴 책이 대학 영어교재로 채택돼 화제다.

특히 순수했던 아들의 삶을 다룬 이 책이 교재가 되기 까지에는 영문학을 전공한 백인 교수의 헌신적인 지도와 격려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재학생들은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책이 미국 전역의 일선 학교에서 교재로 쓸 수 있도록 알리기 작업에 열중이다.

화제의 책은 로스앤젤레스시내 코리아타운 인근에서 살고 있는 이혜영(64.미국명 리사 리)씨가 쓴 `The Rich Boy Stands There Always'.
80여년 역사의 로스앤젤레스 시티 컬리지(LACC)에서 재학 및 졸업생이 쓴 책이 교재로 채택되기는 이번이 사상 처음인데, 이씨가 이 책을 쓰기 까지의 사연을 아는 이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사별한 남편을 묻고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게하고 싶지않아 지난 1974년 한살짜리 이유빈(미국명 폴 리)군을 안고 LA 땅을 밟은 이씨는 힘겨운 부동산업을 하면서도 아빠이자 엄마, 친구의 역할을 모두 해내며 유빈군을 반듯한 청년으로 키웠다.

유빈군은 1990년 1년간 모은 용돈 600 달러로 라면 120상자를 구입, 홈리스에게 전달하는 등 11살때부터 "남을 도우며 살겠다"면서 청소년으로는 쉽게 하기 힘든 선행을 베풀어 동포 언론에서는 `다운타운의 소년 산타클로스'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주립대(UCSB) 진학이 확정된 유빈군이 1992년 조국과 모국어를 알기 위해 6주일정의 연수를 떠난 것이 이씨를 본 마지막이었다.

유빈(당시 18세)군은 7월 31일 새벽 서울 봉천동 서울대 기숙사에서 보온물통의 뚜껑을 누르다 감전돼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진 뒤였다.

이씨는 당시 서울대나 정부 당국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었으나 아들의 죽음을 오히려 훼손한다며 거론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들에게 입학 선물로 주려던 승용차 구입비와 등록금 등 4만여 달러를 모아 `이유빈 추모재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부산 동아대 국문과 출신의 이씨는 한때 극심한 거식증에 시달리는 등 체중이 30kg대로 떨어지는 고통을 받는 가운데 숱한 자살의 유혹에 빠지기도 했지만 신앙으로 몸을 추스르고 세상을 달리한 아들에게 매일 글을 써 태평양에 띄워 보내며 허전함을 달래다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1993년 맨 처음 발간된 산문집 `하늘로 치미는 파도'였고 1996년까지 4년간 출간된 소설과 산문집, 포토에세이 등이 모두 6권이나 됐다.

이씨는 영어로 된 책을 내보라는 주위의 권유를 받은뒤 이를 압축해 한권의 책으로 만들기로 하고 한국에 번역을 의뢰한뒤 미국 출판사를 두드렸지만 반응이 없자 원고 뭉치를 창고에 처박아뒀다.

1999년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어릴적부터 꿈꿨던 미술 공부를 위해 2000년 1월 LACC에 입학한 이씨는 영어 공부를 위해 ESL(제2의 언어로서 영어교육) 코스에 등록했고 1년뒤 ESL 5단계를 공부하면서 조 라이언(53) 교수를 만났다.

이때 이씨의 자기소개서를 읽으면서 원고의 존재를 알게된 라이언 교수는 이씨에게 원고를 가져오도록 했고 전부를 살펴본뒤 훌륭한 내용이지만 엉터리 영어에 제대로 맞춰지지 않은 퍼즐 조각이라고 결론을 내리고는 이씨 본인만이 책을 완성할 수 있다면서 다시 글을 써오도록 했다.

기초영어인 ESL을 시작하던 이씨는 도저히 감당할 실력이 되지 않았지만 라이언 교수는 할 수 있으니 포기하지 말라면서 끊임없이 이씨를 격려했고 이씨가 밤새 작업해 가져오는 글들을 꼼꼼히 수정해나갔다.

수많은 좌절의 고비에서 라이언 교수와 외국인 친구들은 이씨를 당기고 밀어줬고 마침내 2004년 복사용지로 만든 바인딩 북이 졸업반 필수영어의 교재로 채택됐다.

2년간 추가 수정을 거쳐 지난 5월 모두 309쪽짜리 정장본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 책의 후반부에는 유빈이 썼던 저널과 일기, 그동안 교재를 배우며 감동받았던 학생들이 보낸 편지와 헌정시 등도 포함됐다.

6일(현지시간)에는 해마다 갖는 저자와의 대화가 3번째 열린 날이었는데, 교내 제퍼슨강당 307호실에는 30여명의 학생들이 라이언 교수와 함께 이씨를 반갑게 맞았다.

이날 학생들은 유빈과의 생활, 독신을 고집한 이유, 모국어연수를 보낸 일을 후회하지 않는 지 등을 조목조목 물었고 이씨는 진솔하게 답변하면서 아들과 어려운 형편의 이웃들을 돌봤던 일이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으며 학생들은 이씨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지난해 LACC 졸업후 시각디자인과 사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아메리칸 인터컨티넨털 대학(AIU)에 진학, 90학점을 모두 A학점으로 따낸 이씨는 7일 영국으로 떠나 두달간 AIU 분교에 머물면서 공부를 계속할 예정이다.

맨 처음 원고를 읽는 순간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는 라이언 교수는 교재 채택 이유로 ▲이민자의 진솔한 삶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운 이야기 ▲아들을 잃은 후의 극복과정 등 세가지가 책 안에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라이언 교수는 "힘겨운 이민 생활을 견뎌나가며 사랑으로 키워낸 아이가 믿기 힘든 사고로 숨지고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믿음으로 극복한 이씨의 삶은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들이 꼭 배워야 한다고 믿었기에 책으로 만들자고 했고 어떤 반대도 없이 교재로 채택했다"며 "이 책은 이씨의 노력의 결과물이며 나는 조금씩 교정해줬을 뿐"이라고 밝혔다.

미술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간이 된다면 선교활동도 하고 싶다는 이씨는 "폭풍우가 닥칠때마다 슬픔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하면 된다, 끝까지 매달린다는 각오로 임했더니 영어편지 한 장을 쓰지 못하던 내가 책을 완성하게 됐다"며 "이 책이 어려운 처지의 부모, 위기에 놓인 청소년, 희망을 잃은 모든 이들에게 밝은 빛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라이언 교수와 재학생들은 오는 9월이나 10월께 사인회를 겸해 일선 영어 지도교사를 초청, 이 교재를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할 예정으로 있는 등 책 알리기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장익상 특파원 isja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