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제1의 금융도시인 취리히.역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파라데광장(Paradeplatz)의 한 귀퉁이에 6층짜리 석조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 세계 랭킹 1위인 UBS의 본사.1층 현관으로 들어서자 안내석의 검은 양복을 입은 노신사 2명이 취재진을 맞이한다. 건물 천장과 벽의 우유빛 대리석이 대형 샹들리에와 어우러지면서 마치 중세시대 귀족의 '집사'를 연상시킨다. 취재진이 미팅 쪽지를 건네자 그들 중 한 명이 엘리베이터로 안내한다. 기자가 "몇 층으로 가면 되느냐"고 묻자 "그냥 타시죠"하는 대답이다. 몇 초 후 엘리베이터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고객 상담실이 위치한 3층.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비밀 사교클럽 분위기다. 또 다른 '집사'가 일행을 준비된 상담실로 안내한다. 현관에서 상담실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약 30초.의전은 거의 국가 원수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스위스 비밀금고는 이제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카를로 A 그리지오니 UBS 웰스매니지먼트(WM) 부회장은 "스위스 은행들의 비밀계좌는 사라졌으며 이제 그 자리를 PB계좌가 대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지오니 부회장은 "UBS가 세계 PB의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외부 압력에도 불구하고 고객의 자산을 온전하게 지켜준다는 신뢰가 수백년에 걸쳐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주인의 재산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집사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실제로 비밀과 안전을 중시하는 전 세계 부호들은 스위스 은행들의 금고를 가장 많이 애용한다. 스위스PB연합에 따르면 전 세계 역외(offshore) 자산관리 시장에서 스위스 은행이 차지하는 비중은 33%(2조8000억달러)에 달한다. 영국(15%) 미국(12%) 홍콩·싱가포르(7%) 등을 제치고 1위다. 그 덕분에 인구 35만명의 소도시 취리히는 뉴욕 런던 프랑크푸르트 도쿄 홍콩에 이어 세계 6위의 글로벌 금융센터로 성장했다. UBS CS뿐 아니라 크고 작은 350여개 은행이 둥지를 틀고 있다. CS의 아시아 PB 총책임자인 루돌프 H 에스처 이사는 "은행뿐만 아니라 연방정부도 고객의 재산을 보호해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인식이 지난 5~6세대를 거쳐 부호들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다"고 전했다. 연방정부는 1934년 나치의 탄압을 피해 유대인들이 스위스은행에 돈을 맡기자 은행법을 개정,'눔버른 콘도(비밀계좌제도)'를 승인하기에 이른다. 그동안 관행이었던 비밀계좌를 정부가 공식 인정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스위스 은행들은 '검은 돈'의 은신처란 악명을 얻기도 했다. 유럽연합(EU)이 2000년 스위스를 포함한 EU회원국에서 세금을 탈루한 고객의 신원을 은행이 보호하지 못하도록 결정하면서 비밀계좌 제도는 겉으로 '효력'을 잃었다. 하지만 고객을 위한 '비밀유지 원칙'은 여전히 갑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스위스 최고(最古) 은행 '롬바르드 오디에르 다니에르 헨츠(LODH)'가 설립된 것은 프랑스 대혁명 직후인 1796년이었다. 11명의 파트너로 운영되는 LODH는 200여년 동안 단 한번도 '외도(리테일뱅킹)'를 하지 않은 순수 프라이빗 뱅크로 유지하면서 자산 100조원의 세계 PB랭킹 22위에 올라 있다. 제네바의 LODH 본사에서 만난 필립 고든레녹스 수석 부사장은 "LODH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여러 번의 경제·금융시스템 위기에도 살아남았다"며 "수세대를 거쳐오면서 창업자의 후손들과 고객의 후손들 사이에 끈끈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취재진이 "지하 비밀금고를 보여달라"고 하자 필립 부사장은 "고객만 들어갈 수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입구라도 보여줄 수 없느냐"고 재차 요구하자 "고객과 마주칠 수 있어 안 된다. 10일 전에 예약을 하면 시간을 조정해보겠다"고 했다. 첫째도 고객,둘째도 고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