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필메리디스 SC제일은행장은 누가 봐도 평범한 스타일이다.


권위를 내세우는 일이 거의 없다.


다른 은행장처럼 '근엄한(?)' 신년사도 발표하지 않았다.


대신 새해 첫날 각 부서를 돌며 직원들과 악수하고 덕담을 나눴다.


주말이면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서울시내 구석구석을 탐험한다.


그가 '터키계 영국인'인지 '그리스계 미국인'인지 분명히 아는 직원도 별로 없다.


그저 마음 좋은 '이웃집 아저씨'로 통할 뿐이다.



물론 최고경영자(CEO)로서는 다르다.


저돌적이라고 할 만큼 강한 추진력을 갖고 있다.


'세븐 일레븐(seven eleven·아침 7시 출근,밤 11시 퇴근)'이나 '네버 고 홈(Never go home)'이란 별명이 잘 말해준다.


외국계 이미지를 벗은 한국 은행,다시 말해 '가장 토착화한 국제은행'으로 거듭나겠다는 목표를 하루빨리 달성하기 위해서다.


실제 지난해 4월 제일은행을 인수한 이후 필메리디스 행장은 '토착 경영'에 주력했다.


이름부터가 그렇다.


'SC제일은행'은 세계 56개국에 진출한 SCB(스탠다드차타드뱅크)가 현지 은행 이름을 함께 사용한 유일한 사례다.


은행 내 공식 언어도 다른 외국계 은행들과 달리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정하고 각 부서마다 통·번역사를 배치했다.


문화적 통합을 중시한 배려다.


노조위원장과 매월 두 차례 이상 만나는 등 경영도 한국식이다.


해외 점포를 방문하면 그곳 직원들과 함께 '한국의 날' 행사를 갖고,외환 딜링 룸을 새로 만들면서 돼지머리와 시루떡을 차려 놓고 한국식 고사를 지내는 등의 정서적 접근도 적극 펼쳤다.


"SCB는 152년 역사를 자랑하는 국제적 은행이지만 한국에서는 철저히 한국인이 되겠다"는 것이 필메리디스 행장의 생각이다.


물론 속까지 한국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조직 내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직원들로선 우선 '귀찮아졌다'는 게 첫 반응이다.


과거에는 행장이 '상의하달(上意下達)'식으로 목표를 정하고 지시를 내리면 됐고,영업점에선 이를 무조건 따르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업무 방식이 '하의상달(下意上達)'식으로 바뀌었다.


필메리디스 행장은 "효율성 향상을 위해 개선할 점은 무엇인가" "직원 개인의 발전을 위해 사측에서는 무엇을 해주길 바라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고 아래로부터 답을 듣기를 원한다.


직원 입장에서는 '머리를 써야 할'일이 자꾸 늘어나는 셈이다.


SC제일은행 앞에 놓인 과제는 한둘이 아니다.


조직 문화를 수동형에서 능동형으로 바꾸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이런 변화가 과연 어떤 결실을 맺을까에 대한 답을 보여줘야 한다.


지난해 3분기까지 SC제일은행의 누적 당기순이익은 535억원.국민(1조8285억원),우리(1조3355억원),외환(1조1695억원) 등과 비교하면 한마디로 조족지혈이다.


총자산 대비 이익률(ROA)도 0.11%로 국내 시중은행들의 ROA(1.0∼1.7%)를 따라잡기에는 갈 길이 멀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가계 담보대출만 부쩍 늘렸을 뿐 기업금융 영업이 저조했던 점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필메리디스 행장은 "SC제일은행은 마라톤 선수"라고 말한다.


단기적인 이익 창출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시스템을 개선하고 선진 금융 기법들을 점진적으로 도입한다면 3년 뒤쯤 국내 은행업계에 대변혁을 몰고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국내 최대 딜링 룸(80석)을 만들고,'글로벌 마켓 센터' 등 기업금융 전담 팀을 확대했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각오다.


SC제일은행은 '표준치 이상의 성과를(More than standard)'이란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있다.


'빨리빨리'의 나라에서 필메리디스 행장이 마라톤처럼 뛰어 그런 성과를 낼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유영석 기자 yoo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