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온 식구가 쉬는 날을 하루 잡는다. 문짝을 모두 떼어내 그늘에 두고 물을 뿌려 낡은 종이를 뜯어내고 새 창호지를 바른다. 한사람은 풀칠을 하고 한사람은 갖다 주고 다른 사람은 문틀에 대고 붙인 다음 솔로 마무리한다. 사이사이 말린 코스모스 꽃잎이랑 단풍잎도 넣고. 날이 더 추워지고 감나무 끝에 까치밥으로 남겨둔 홍시가 외로울 입동 즈음이면 식구들은 물론 일가친척이나 이웃이 함께 모인다. 한쪽에선 소금물에 절인 배추를 씻어 소쿠리에 담고,한쪽에선 무를 썰고 파 마늘 생강을 다진다. 무채에 양념 다진 것과 멸치젓 생새우 생굴 배 등 온갖 걸 넣고 속을 만든 다음 배추에 버무린다. 간이 적당한지 배춧잎에 싸서 서로 입에 넣어주며 깔깔댄다. 다 버무리고 나면 독에 차곡차곡 넣고 우거지를 덮는다. 맛있게 보이는 걸로 미리 골라 뒀다 함께 일한 이들에게 몇포기씩 나눠주고 속이 남으면 대접에 따로 담아 배추와 함께 상에 올린다. 미리 파놓은 땅속에 독을 묻고 밀짚을 덮으면 김장 끝. 김장 김치만 있으면 겨우내 쭉쭉 찢어 밥 위에 올려놓고 먹기도 하고,김칫국도 끓이고 김치전도 붙이고 김치찌개도 한다. 메밀묵과 도토리묵도 무치고 시원한 국물에 국수를 말아 밤참도 먹는다. 뿐이랴.예전엔 삭풍에 귀가 얼으면 얼음이 버석버석하는 김치국물에 넣어 얼음을 빼고,연탄가스 중독의 특효약으로도 썼다. 시대가 바뀌면 세상이 변하고 삶의 양식도 바뀌게 마련이다. 게다가 의ㆍ식ㆍ주는 각기 떨어져 별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한옥 대신 아파트 생활이 일반화되면서 집에 관련된 건 물론 입고 먹는 일 등 살림살이가 모두 크게 바뀌었다. 문창호지 바르기는 물론 김장을 담그는 일도 보기 힘들어졌다. 창호지 바르기,김장,장 담그기 등은 계절 준비이기도 하지만 가족과 이웃의 정을 느끼는 일이 되기도 한다. 파는 김치의 위생문제를 탓하기 보다 올해엔 다소 힘들더라도 온 식구가 날 잡아 김장을 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