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면 회 < 한국외대 교수·정치외교학 > 지난달 18일,1년 앞당겨 실시된 제16대 연방의회 선거 이후 독일정치가 짙은 안개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뚜렷한 승자가 없는 선거였기 때문이다. 한 후보자의 사망으로 2일 뒤늦게 치러진 드레스덴의 추가선거를 마지막으로 공식 선거는 끝났지만 뚜렷한 반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가장 많은 득표를 한 야당 기민ㆍ기사련의 총리 후보 앙겔라 메르켈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반면,"나 없는 정부 구성은 없다"고 외치는 현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보면 이번 선거의 최종 승리자가 그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독일 통일 15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한 3일 총선 결과를 둘러싼 혼돈이 독일정치를 에워싸고 있다. 선거 결과는 선거 이전과 선거 과정에서 예상됐던 것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조기선거가 선언된 지난 5월만 하더라도 현 집권세력인 사민당과 녹색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은 주요 야당세력인 기민ㆍ기사련에 대한 높은 지지율로 나타났다. 1998년 이후 7년 동안 '신중도노선'을 표방하면서 집권해온 사민당의 '개혁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었고,주요 거시 경제지표도 현 집권세력에는 매우 불리했던 선거 판세였다. 때문에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기민ㆍ기사련이 집권여당인 사민당에 단지 0.9%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기민ㆍ기사련은 35.2%,사민당은 34.3%를 각각 획득했고,기민ㆍ기사련의 연정 파트너를 자임하면서 시장 중심적인 경제정책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자민당은 9.8%로 오랜만에 독일정치에서 세 번째로 강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사민당의 경제정책 개혁노선,특히 '아젠다 2010'과 '하르츠 법안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사민당을 이탈,새롭게 조직된 좌파 정당은 8.7%로 연방의회에 54명의 의원을 진출시켰다. 연방의회 의원이 2명에서 54명으로 늘어났으니 가장 큰 신장세를 보여준 정치세력이 된 셈이다.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 독일 유권자들은 경제정책 및 사회정책과 관련해 어느 한쪽 정당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지 않았으며, 좌우세력이 균형을 이루기를 원한 것으로 풀이된다. 앞으로 전개될 독일 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거 결과는 주도적인 정당에 의한 연합정부 구성 가능성을 어렵게 함으로써 독일정치를 불안정과 불확실성으로 몰아가고 있다. 불확실한 정치는 불안정한 시장을 낳는다. 선거 이후 독일 경제계가 기민련과 사민당의 대연정을 중심으로 한 안정된 정치질서를 조속히 마련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다른 소연정에 비해 대연정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사실이다. 5일 있을 기민련과 사민당 간의 연정 협상 논의가 대연정 합의의 중대한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결과는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뚜렷한 승자가 없는 선거 결과는 정당 간의 지루한 이해 절충과 끈질긴 권력 배분의 협상과정을 필요로 하고,동시에 정체성과 관련해 정당 내부에서 발생하게 마련인 갈등과 분열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와 결부되기 때문이다. 특히 당의 노선과 관련한 사민당 내부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부각될 것이다. 독일정치의 불안정은 유럽연합(EU) 차원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EU의 기관차이자 가장 큰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독일의 정치가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면,유럽 통합을 비롯한 EU의 정책결정이 강력하게 추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일 선거 결과에 유럽 국가들이 즉각적으로 우려를 표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튼 16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와 그 결과는 여러 면에서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 차원에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