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배 태평양 사장(42)이 대표이사로 취임한 97년 3월,당시 태평양의 주가는 2만원대였다. 그로부터 약 8년 뒤인 현재 태평양 주가는 30만원대를 넘나들고 있다. 서 사장 체제 이후 주가 상승률은 15배에 달하고 있다. 기업 가치가 이 정도 올랐으면 제법 바깥에 자랑(?)할 법도 하지만 서 사장은 회사가 아닌 CEO(최고경영자)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것에 대해 극도로 조심스러워한다. '기업가는 실적으로 말해야 한다'는 평소 지론 때문이다. 취임 후 8년간 서 사장이 나선 공식 기자 간담회는 취임 때와 2002년 해외 사명을 아모레퍼시픽으로 바꿀 때,2004년 중국 상하이에서 글로벌 비전을 발표할 때 등 단 세 번뿐이었다. 이달 초 창립 6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도 기자간담회나 인터뷰 요청을 많이 받았지만 서 사장은 "경영에만 전념하겠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서 사장은 언론 노출은 최대한 피하고 있지만 사내에서는 친근하고 격의없는 '서경배님'으로 통한다. 99년 사내 인트라넷을 구축,인터넷으로 사장에게 직보(直報)하는 시스템을 도입했고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2002년부터 사내 직급 호칭을 없애 상하직급 간 두루 '000님'으로 부르도록 했다. 서 사장은 독서광으로도 유명하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한 달에 최소 5권 이상은 읽는 데다 관심 분야도 경영·역사·철학·미술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태평양의 한 임원은 "서 사장의 독서 취미가 태평양의 비전을 이룬다고 보면 된다"며 "유익하다 싶은 책은 직원들에게 직접 선물하고 소감까지 물어 봐 공부를 안 하고는 배길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고(故) 서성환 회장의 2남4녀 중 차남인 그는 신용을 최고로 여긴다는 '개성상인'의 후예.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후 미국 코넬대 경영대학원을 나와 개성상인 1세대가 경험하지 못했던 글로벌 시각과 선진 경영기법까지 체득했다. 박성철 홍보담당 상무는 "'설화수''헤라'가 연매출 3000억원대의 파워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향후 '브랜드 시대'가 올 것이라는 서 사장의 지론에 따라 90년대 초부터 핵심 브랜드에 적극적인 투자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구부정하게 등을 낮춘 자세로 조용조용하게 말하는 서 사장은 정적인 인상과는 달리 '이거다' 싶으면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추진력을 지니고 있다. 지난 93년 태평양 기획조정실 사장 시절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화장품과 관계없는 계열사들을 쾌도난마식으로 정리한 게 좋은 예.올초엔 '패스트&포워드'(변화에 한발 앞선 대응) 경영 방침을 실현하기 위해 전무직을 없애고 전무 5명과 상무 5명 등 10명을 대거 부사장으로 승진시키고,40대 초·중반 부장 5명을 상무로 발탁했다. 한층 젊고 빠른 의사 결정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키워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