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 시인 > 우리 반 2학년 아이들 네 명이 내 앞에 앉아 있다. 나를 바라보는 눈망울들이 때로 겁먹고 때로는 그지없이 천진난만하다. 까만 눈망울과 표정이 너무 진지해 내 마음이 서늘할 때가 다 있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모습들 중에서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제일 좋아한다. 그들의 몸과 마음은 사심이 없이 깨끗하고 산뜻해 보인다. 나는 지금 앉아 있는 이 아이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가르쳤다. 화가 날 때 나는 내 앞에 있는 채훈이 이름을 부른다는 게 채훈이 아버지 이름을 불러 채훈이를 어리둥절하게 할 때도 있다. 하는 짓이나 몸짓이 꼭 아버지를 닮아 나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 학교를 졸업했다. 내가 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교실이 없었다. 전쟁으로 인해 교실이 모두 소실됐기 때문이다. 교실이 없는 우리들은 운동장 가에 있는 큰 벚나무에 매달아 놓은 칠판 앞에서 공부를 했다. 공부를 하다가 비가 오면 선생님은 우리들을 집으로 보내주었다. 추운 겨울 지붕도 책상도 없는 교실에서 벌벌 떨다가 눈이 내리면 또 집으로 갔다. 2학년에 올라가서야 학교에 주둔하던 군인들이 교실을 지어주었다. 내가 이 학교를 졸업할 때 우리 반은 모두 18명이었다. 70년대 초 내가 선생이 되어 이 학교에 왔을 때 학생들은 700명쯤 됐다. 나는 우리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강 길을 걸어다녔다. 아침저녁 봄, 여름, 가을, 겨울 학교 길은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었다. 그 강 길에는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나는 그 길을 20년 넘게 걸어다녔다. 초등학교 6년을 걸어다녔고, 선생을 하며 20년쯤 걸어다녔으니, 26년 동안 그 길을 걸어다닌 셈이다. 하늘빛을 닮은 파란 호수가 있고 산딸기가 빨갛게 익어 가는 그 길이 사라진 후에도 나는 지금까지 이 학교와 이 학교 부근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내가 50년 전 이 학교에 1학년으로 들어왔을 때 내 키보다 작았던 소나무는 이제 나보다 몇 배나 키가 컸다. 그 소나무 중간에 새끼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이 나 있었는데, 지금 그 구멍은 내 주먹이 들랑거릴 정도로 커졌다. 그 때 전교생이 12학급이었는데 반마다 두 양동이씩 나누어 먹고도 남을 만큼 열던 살구나무는 이제 늙어 살구꽃이 드문드문 핀다. 나이가 들어서도 저렇게 늙은 가지에 고졸한 꽃을 피우는 나무들을 보며 나는 감동한다. 다 살고 늙어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죽어가는 저 살구나무 곁에서 나도 50년 동안 살며 나이 들고 늙어가고 있다. 수 없이 다른 얼굴을 한 아이들은 살구처럼 내 곁을 떠나갔지만 말이다. 이 땅에 태어나 자라 지금까지 고향의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살아 온 날들은 늘 그 날이 그 날 같은 세월이었다. 교육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선생을 시작한지 5년쯤 지났을 때 나는 이 작은 학교에서 평생을 선생으로 살 것을 다짐했다. 철이 없고 치기 어린 다짐이었고 나와의 약속이었으나, 나는 용케도 나의 다짐을 배반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았다.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그 일이 나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셈이다. 희망 없이 산 삶이, 아니 더 이룰 희망이 없이 일찍 희망을 이루어버린 나의 삶이 그러나 허망하고 쓸쓸하지는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인간다운 얼굴을 한 아이들과 하루를 사는 내 삶을 내 현실로, 내 일생으로 행복하게 가꾸는 것이 그 어떤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내 절대 가치였으니까. 내 앞에는 늘 꽃보다 아름다운 눈부신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점심시간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산천을 울린다. 산으로 삥 둘러싸여 있는 학교 운동장은 늘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어디선가 꾀꼬리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운다. 비 그친 앞산 뒷산 5월 청산이 찬란하다 못해 눈이 시리다. 눈이 부시게 햇살이 쏟아지는 저 장엄한 자연 속에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내 기름진 정신과 풋살구 같은 아이들과 일하는 농부들의 느리고 더딘 삶이 그 어떤 희망보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빛나는 일상이었다. 나는 그 일상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았다. 남이 보기에 하찮고 사소한 것들 같았으나 내겐 지구 만한 무게를 지닌 날들이었다. 나는 잘 살아왔고 잘 살고 있다고 감히 내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