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 노조는 협상이 진행 중이던 지난해 4월 하순께 갑자기 총파업을 벌이겠다고 밝혀 병원측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사측과의 교섭이 완전히 결렬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협상에 돌입하지도 않았는데 6월10일부터 총파업투쟁을 벌이겠다고 미리 선포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노조는 노사협상을 제대로 벌이지도 않은 채 자신이 밝힌 일정에 맞춰 결국 6월10일 파업에 돌입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노조원들로부터 왜 약속대로 파업을 하지 않느냐는 비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자의반타의반 협상 자체를 포기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협상진행 상황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상대방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조건 파업일정부터 밝히는 노조의 후진적 교섭행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미리 파업일정을 정한 뒤 협상진행 과정에 상관 없이 파업에 돌입하는 행위는 상급단체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노총은 매년 4월쯤 시기집중투쟁 일정을 발표한다. 물론 노사가 협상테이블에 앉기도 전이어서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질지,어떨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파업일정부터 밝히는 것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이에 대해 "그래야 사용자들이 압박감을 느껴 요구조건을 잘 들어준다"고 주장한다. 법을 어기는 불법행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노동운동가들은 불법파업을 벌여 감방에 갔다오면 '별'을 달았다며 오히려 명예롭게 생각하기도 한다. 소위 '조폭문화'가 노동현장에까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현장에서 진정한 '투사'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별 한두 개는 달아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이에 따라 스스로의 신분 상승을 위해 불법행위를 서슴지 않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지난해 7월 GS칼텍스(옛 LG칼텍스정유) 노조가 파업을 벌인 것은 단 4차례 협상을 거친 뒤였다. 연봉 7천여만원으로 국내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이 회사 노조가 파업을 벌인 이유는 임금 15% 인상과 5조3교대 등의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전사고 위험과 경제에 미치는 파장 등이 커 필수공익사업장으로 지정된 회사여서 파업을 함부로 벌일 수 없었지만 노조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받겠다"며 불법파업을 강행한 것이다. 이 '배부른 노조'가 파업과정에서 보여준 '허동수 회장 참수 퍼포먼스'나 '대학에서조차 외면한 떠돌이파업'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빗나간 행태를 그대로 보여준 사례다. 협상테이블에서 욕설과 삿대질이 오가는 것도 예사다. 현재 상급단체를 이끌고 있는 L씨는 협상대표가 마음에 안 들거나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며 볼펜을 집어던지고 삿대질하며 욕설을 해대는 몰상식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매년 노조의 악성 파업에 시달리다 98년 부도의 운명을 맞았던 통일중공업. 이 회사는 지난 2003년 2월 삼영의 최평규 회장이 인수했지만 거친 노사문화는 달라진 게 거의 없다. 지난해 5월 최 회장이 노조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야 이 개XX야! 조합에서 당장 나가! 이 개XX 칼로 배X지를 찔러 죽여버리자!" 한 노조원이 폭력배들이나 사용할 폭언을 쏟아낸 것이다. 할 말을 잃은 최 회장은 결국 노조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툭하면 잔업거부 조기퇴근 부분파업 전면파업,이래도 노조가 책임이 없습니까?" 한 통일중공업 노조원이 지난해 4월 자유게시판을 통해 노조의 잘못된 운동문화를 비판한 글이다.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시작된 지난 87년 이후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한국의 교섭문화는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쇠파이프 LPG통 등으로 대표되는 폭력성은 그나마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협상테이블에는 볼썽사나운 광경이 난무한다. 단체협상은 2년마다 열리지만 아직도 한보따리씩 요구사항을 풀어놓아 상대방의 진을 빼는 것은 정기행사다. 회사일 때문에 바빠 사장이 협상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협상할 수 없다며 버티기 일쑤다. 일부 노조는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단체협상안을 제시해 회사측을 당황케 만든다. H컴퓨터 노조는 상급단체가 지침으로 내려보낸 안을 그대로 베껴 회사측에 제시했다가 망신을 당했다. 상급단체의 지침을 따르다보니 회사의 경영내용과 거리가 먼 것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해고자복직 등 협상대상이 아닌 문제를 들고 나와 노사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파업현장에서 근로감독관을 지낸 최관동 포항노동사무소장은 "힘으로 밀어붙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노동계의 투쟁만능주의와 노사협상이 타결되면 모든 불법행위를 없었던 걸로 해주는 회사측의 양보가 어우러져 잘못된 파업문화를 키우고 있다"고 분석했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