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상반기부터 단계적으로 발행되는 새 은행권에 기존의 인물도안을 그대로 유지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세종대왕(1만원권), 율곡 이이(5천원권), 퇴계 이황(1천원권) 등 세 인물은 공교롭게도 모두 이(李)씨 성의 인물인데다 100원권 동전의 충무공 이순신마저도 같은 성씨라는 점, 그리고 남성 일색이라는 점 때문에 그동안 인물 도안을 놓고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화폐제도 개선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여성계와 과학.기술계, 독립유공자단체 등등에서는 여성이나 과학자, 독립투사 등을 새로운 인물을 지폐도안으로 채택할 것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실제로 지난해말에는 `새지폐에 우리 과학자 얼굴 모시기 운동 추진위원회'(위원장 연세대 의대 방사선과 정태섭 교수)라는 이름의 모임이 이공계.과학계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2천257명의 서명을 받아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을 새 지폐의 도안으로 채택할 것을 제안하는 건의서를 한은에 제출한 바 있다. 이에 앞서 작년 초에는 한 여성단체가 신사임당을 새 화폐도안으로 채택할 것을 촉구하는 가두캠페인을 한은 정문앞에서 전개한 적이 있으며 작년 11월에는 열린우리당의 김희선 의원 등 국회의원 41명이 새 화폐가 도입될 경우 독립애국지사 인물을 채택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특히 일본.중국 등과의 역사 왜곡 문제가 분출될 때는 독도나 발해, 광개토대왕을 도안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한은 홈페이지 게시판에 심심찮게 제기돼 왔다. 이러한 각계의 주장과 요구가 갈수록 수위가 높아짐에 따라 정부와 한은은 이러한 목소리를 단순한 제안이 아닌 부담스런 압력으로 여기게 됐으며 결국 고육지책으로 `현상 유지'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만일 기존 인물 도안을 바꿀 경우 이씨 종친회 등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올 것이 뻔한데다 예컨대 특정 집단의 요구를 수용, 인물을 바꾼다면 나머지 이해단체에서도 반발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 현상유지의 배경으로 풀이된다. 설령 인물을 완전히 바꾸기로 결론을 내린다면 새 인물 채택을 위한 의견수렴과 전문가집단의 협의를 통한 결론 도출, 디자인의 전면교체 등의 작업에 상당한 시일이 걸리게 돼 새 은행권 도입 일정 자체가 마냥 지연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유지 결정에도 불구, 새로운 인물의 화폐도안 채택 요구는 앞으로 기회있을 때마다 계속 분출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당분간 고액권 발행은 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으나, 여건이 변화해 고액권 도입을 서둘러야 할 시점이 도래하면 5만원권 또는 10만원권 지폐에 과학자나 독립유공자, 여성 등을 채택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기자 shpar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