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과거의 성공 경험을 버리고 새로운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은 두려운 모험이다.


삼성전자 직원들이라고 다를게 없다.


최고경영진들이 앞장서서 이끌지 않았다면 가치혁신(VI:Value Innovation)도 수많은 경영혁신 전략 가운데 하나로 머물렀을 것이다.


이 회사 최고경영진은 프로세스 개선처럼 당장 결과가 나오는 경영기법이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회사의 성장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전략론으로서의 가치혁신에 관심을 기울였다.


VI를 기업문화로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기원 기술총괄전략실장(부사장ㆍ56)을 만났다.


그는 "새로운 사고방식은 전사원들이 체질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VI는 규모가 작은 기업들이 오히려 활용하기 쉬운 실용적인 혁신 전략"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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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이기원 부사장은 사내에서 '퓨처리스트(futuristㆍ미래학자)'로 통한다.


실제 하는 일도 5∼10년 뒤에 먹고 살 기술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그는 지난 2000년 윤종용 부회장 직속의 독립조직으로 출범한 기술전략실(CTO전략실)을 맡으면서 삼성전자의 미래기술전략 수립을 주도해 왔다.


미래의 변화를 읽어내는 이 부사장이 가치혁신론 전파에 앞장 서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미래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론이 바로 VI이기 때문이다.


그가 VI를 처음 접한 것은 지난 97년.


가치혁신론의 주창자인 김위찬 교수(프랑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의 특강을 통해서였다.


이후 2000년부터 가치혁신의 산실인 VIP센터를 직접 관할하면서 VI이론 확산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됐다.


전기공학을 전공한 이공계 출신(서울대 학사, 미 UC버클리대 석사, 미시간대 박사) 답게 가치혁신을 얘기하면서도 '실제적이고''논리적인' 성과를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가치혁신론을 처음 접했을 때 어땠나.


"다각도로 논의되던 혁신 사상들을 논리적으로 잘 정리했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특히 혁신을 실행하기 위한 토대를 제대로 구축했다고 본다."



-삼성전자에도 혁신을 위한 토대가 필요했다는 뜻인가.


"삼성전자는 수년전까지만 해도 '재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에 불과했다.


앞선 기술과 제품을 좇아가기 바빴다.


초일류기업을 바라보는 현 시점에선 더 이상 추격할 대상이 없다.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 방법론이 바로 가치혁신이다."



-이전에도 다른 경영도구를 많이 도입했는데.


"가치혁신은 삼성전자의 경영혁신을 이끌기 위한 최상위개념이다.


구성원들이 공통의 목적을 갖고 혁신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VI같은 '명확한 혁신 주제(theme)'가 필요하다."



-새 경영도구에 대해 사원들이 부담스러워 하진 않았는지.


"보통의 경우 직원들은 변화를 싫어한다.


해오던 일을 그대로 하기를 원한다.


가치혁신의 경우도 톱 경영진들이 챙기지 않았다면 빛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는 얘기 같다.


"이전에는 제품개발을 수행 중인 엔지니어들에게 왜 그런 기능을 넣었느냐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경쟁사 제품을 모방하는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고객에게 이러이러한 가치를 주기 위해 개발한다'고 자연스럽게 답변한다.


고객에게 어떤 혜택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기업문화가 가치혁신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뜻인가.


"아직 정착단계는 아니다.


VI를 기업문화로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VIP센터의 기능을 더 강화할 계획이다.


현재는 주요 전략제품들만 VIP센터를 통해 기획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모든 제품기획에 가치혁신 개념을 적용시키려고 한다.


대대적인 교육을 통해 엔지니어를 포함한 모든 직원들이 가치혁신을 체질화시킬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다.


가치혁신 마인드가 몸에 배게 되면 엔지니어들이 제품을 설계할 때도 '어떻게 만들면 소비자가 좋아할 것인지'를 무의식 중에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실력에다 가치혁신 마인드까지 겸비한 직원들이 필요하다."



-삼성전자 VI는 여전히 원가절감에 치우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가치혁신은 원가절감과 효율 향상에 초점을 맞춘 가치경영(value management)과 부가가치 창출에 역점을 둔 가치창조(value creation)로 나눌 수 있다.


그동안 가치경영에 중점을 두었지만 지난해부터는 가치창조를 더 늘리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반도체 부문도 가치창조 중심의 VI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나.


"반도체의 경우는 전략캔버스같은 도구를 적용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메모리 개발에는 이미 가치혁신 개념을 적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제품을 기획할 때 단순히 집적도를 높이는 데만 치중하지 않았다.


대신 주요 고객사인 PC, 휴대폰업체, 게임기 업체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램버스D램,낸드플래시메모리 같은 신제품을 기획하는데 신경을 썼다.


세계 경쟁사들과 달리 고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VI는 경쟁우위를 이미 확보한 대기업의 논리라는 지적도 있다.


"가치혁신은 커다란 노력 없이 비교적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경영 도구다.


전사적인 체질화가 중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중소기업이나 벤처 같은 작은 규모의 회사들이 도입하는데 유리한 면도 있다."



-그래도 새로운 자원을 상당히 투입해야 하는 것 아닌가.


"VI는 마인드이자 시스템이다.


물론 중소기업들은 완벽한 여건을 갖추고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선뜻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도요타를 보라.이 회사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한 배경에는 도요타 못지 않게 혁신으로 무장한 협력업체들이 있었다.


삼성전자도 이미 VIP센터의 상품기획과정에 협력사를 참여시켜 VI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다.


가치혁신적인 중기는 상생(相生)의 관계를 찾으려는 대기업들에 매력적인 파트너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완벽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일단 할 수 있는 부분부터 하나씩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시장에 귀를 기울이면 어떤 것이 지금 필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수원=송대섭 기자 dss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