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노무현 대통령은 행정수도 이전을 왕정시대의 '천도(遷都)'로 비유하고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동안 대다수의 국민들은 행정수도 이전을 인구와 경제적 부의 지나친 서울 집중을 막고 지방균형발전을 위해 추진하는 일상적인 정책의 일환으로 알고 있었는데,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단순한 행정수도 이전이 아니라 지배권력의 교체, 구세력과 신세력의 교체라니 갑자기 혼란스러워진다. 과거 왕조시대였다면 지배권력이나 신·구세력의 의미나 구분이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났겠지만, 지금은 국민 전체가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민주주의시대인 만큼 누가 지배권력이며 신·구세력인지 모호하기 짝이 없다.386이 신세력이고 5060은 구세력인가.열린우리당이 신세력이라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구세력일까. 그게 아니라면 지난 대선 때 노 대통령을 지지한 사람은 신세력이고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 사람은 구세력인가.혹은 서울시민이 구세력이고 충청도민이 신세력이란 말인가. 사실 한국 사회에서 5년 단임의 대통령이 되면서 정체가 모호하면서도 어마어마한 포부를 밝힌 것은 노 대통령만이 아니다. 김영삼 대통령도 5,6공 주도세력으로 이루어진 민자당 후보 출신으로 선거에서 이겨 대통령이 됐으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은 유독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삼았다. 그 중간의 국가발전 단계를 모두 건너뛸 만큼 자신의 순백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런가 하면 김대중 대통령은 '제2건국'을 표방하고 '제2건국위원회'까지 만들었다. '제1건국'이 잘못 됐으니, 자신은 제1건국 세력과는 뿌리가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지금까지는 낡고 헌나라였으니 그와 뿌리가 다른 '새나라'와 '신천지'를 세우겠다고 하면서 기염을 토한 대통령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런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좌절을 겪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초라한 모습으로 권좌 아래로 내려온 것은 정말 안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IMF 구제금융사태를 야기했고, 김대중 대통령도 수많은 부정 비리로 점철된 부패공화국의 짐을 떠안게 됐다.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은 아예 신·구세력의 교체를 들고 나왔다. 구세력과 결별하고 신세력의 '정치적 터'를 잡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취임 1년 밖에 안된 노 대통령의 측근비리나 그 혐의를 보면, 구세력이 저지른 '구악(舊惡)'의 성격이 큰 것이지, 신세력의 '신선미'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배권력의 교체라는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목표보다는 매년 부정부패를 10%씩 없애겠다든지,혹은 매년 국가경쟁력을 20%씩 올리겠다든지 하는 소박하고 구체적인 꿈이 훨씬 더 설득력 있고 국민의 마음을 모을 수 있는 비전일 터이다.왜 '구심력'보다 '원심력'을 불러일으키는 말로 국정의 화두를 삼고 선거의 화두로 삼으려고 하는 것일까. 이번 경우를 보면 높은 밤 하늘의 별들만 바라보고 그 이치를 궁리하다가 바로 자신이 걷고 있던 길의 구덩이를 보지 못해 구덩이에 빠져버린 천문학자의 어리석음이 생각난다. '천도'니 '지배권력 교체'니 하는 거대 담론보다 낮은 데로 임해 지금 우리 공동체가 처해있는 시급한 현안 문제의 해결사로 나서는 것이 대통령의 책무에 훨씬 부합하는 일이 아닐까. 지금 경제와 민생의 현장을 보라.전도유망한 청년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고 상인들은 물건이 팔리지 않아 울상이며 공장주들은 공장이 돌아가지 않아 난리다. 너나 할것 없이 무얼로 먹고살까 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지배권력의 교체를 말하고 있는가. 5년 단임의 대통령은 5년 동안 열과 성을 다해 국민을 섬기라고 뽑은 것이지, 백성 위에 군림하던 제왕처럼 도성을 옮기며 새 왕국의 시조가 되라고 뽑은 것은 아니다. 대선에서 승리한 후 '국민이 대통령'이라던 겸손함과 봉사정신은 어디 갔는가. 대통령이라도 겸손함과 진정한 봉사의 정신을 모르면 '오버'하는 것이다. parkp@snu.ac.kr